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알림

[박석무 칼럼] 대제학을 양보했던 영의정 박순

입력
2019.03.01 04:40
25면
0 0

‘논어’ 태백 편은 ‘지덕(至德)’이라는 말로 시작된다. 중국의 고대 주나라 태왕(太王)의 장자가 태백(泰佰)이었는데, 당연히 태왕을 이어 왕위를 계승하게 되어 있었지만 더 덕이 높은 사람에게 왕위를 양보한 태백의 덕을 ‘지덕’이라고 칭찬한 공자의 말로 시작되는 내용이다. ‘지덕’이란 덕의 지극함, 바로 덕의 극치라고 설명하여 그 이상의 덕은 있을 수 없다는 뜻이라고 해석하였다. 왕위에 오르라는 세 차례의 권고까지 끝내 뿌리치고 왕위를 양보한 태백의 행위는 동양의 역사에서는 최고의 덕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남은 높이고 자신은 낮추는 겸양의 덕이 그렇게 높고 크다는 것을 태백 편을 통해 알 수 있는데, 우리 조선 오백 년 동안에도 왕위를 양보한 사람이야 많지 않았지만 참으로 귀하고 빛나는 벼슬을 남에게 양보한 사례는 더러 있었으니,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사암능양(思菴能讓)’이라고 이익의 저서 ‘성호사설’에 나오는 내용이다. 사암 박순(1523∼1589)은 조선 선조 때에 영의정을 역임한 학자이자 시인이다. ‘사암능양’이란 문자 그대로 사암 박순은 겸양에 능했던 사람이라는 뜻이다.

박순은 벼슬로는 목사를 지냈지만 큰 충신이자 대표적인 시인이던 눌재 박상의 조카로 한성부 우윤과 개성부 유수를 역임한 박우의 아들이다.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뛰어난 관인으로 존귀한 모든 벼슬을 역임했으나 대표적으로 대제학을 거쳐 영의정까지 지냈는데, 당대의 학자이자 관인이던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을 조정에 계속 추천하고 그들을 등용하여 도덕정치를 하라고 선조에게 극구 권장했던 사람이다. 성호 이익은 박순에 대하여 아주 높은 평가를 내리는 글을 썼다. 고대에는 태백처럼 왕위도 양보하고 소보, 허유처럼 왕이 되어달라는 요구를 단호히 거절하고 숨어살던 사람도 많았으나 후세에 와서는 그런 사람도 없고, 그런 덕을 지닌 사람을 볼 수 없다고 한탄하면서 박순을 찬양하고 있다.

“후세에 이르러서는 벼슬에 임명되면 모두 겸손한 말로 사양하는 척하지만 그 마음을 살펴보면 모두 팔을 걷어붙이고 한 번에 천금을 끌어들일 속셈을 가지고 있다. 한 사람도 남을 추천하여 재능 있는 사람에게 벼슬을 양보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라고 말하고는 선조 때의 박순은 그렇지 않았다고 했다. “선조 때 퇴계 이황 선생이 예문관의 제학에 임명되자 대제학 박순이 아뢰기를 ‘신이 나라의 문장을 주도하는 자리에 있는데, 이황이 제학에 제수되었습니다. 나이 많고 큰 덕을 지닌 학자가 도리어 낮은 지위에 있는데 초학자인 후배가 윗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 사람을 쓰는 것이 뒤바뀌었습니다. 청컨대 직임을 바꾸어 제수하소서’라고 말했다.”라는 대목이 있다. 그런 박순의 권고를 받은 선조는 대신들과 논의하여 박순의 말이 옳다고 여기고 이황을 대제학, 박순을 제학으로 다시 발령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면서 성호는 박순의 양보에 감동어린 찬사를 바치고 있다. “아름다워라! 사암의 어짊이여! 세속에 모범이 될 만하도다. 그러나 지금 사람들은 이욕만 멋대로 부리며 이런 일을 본받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하랴. 아, 슬픈 일이다(羙哉 思庵之賢 足以範俗 奈今之利欲肆行無人觀效何 噫).”라고 글을 맺고 있다. 이런 아름다운 기록이 어디에 또 있겠는가. 성호 같은 큰 학자, 문장가가 아니고서야 그런 훌륭한 역사적 사실을 이렇게 아름다운 문장으로 꾸밀 수 있었겠는가.

쥐꼬리만한 벼슬자리가 나오면 염치란 사라지고 서로 차지하려고 온갖 난투극이 벌어지는 세상에서 대제학이라는 가장 명예롭고 가장 귀한 벼슬자리를 선배에게 양보하는 일이 실제의 역사에서 일어났으니 얼마나 장한 일인가. 더불어 성호는 노론 쪽에서만 크게 추앙하는 인물인 사암에 대하여 남인이면서도 사암의 아름다운 양보를 그렇게 높이 평가할 수 있었으니, 성호 또한 탁월한 인물임을 알게 된다.

박순은 정치인으로서도 만만찮았다. 오랫동안 정승의 지위에 있었고, 영의정에 올라서는 공안을 개정하자, 군현을 합병하자, 감사나 수령들이 오래 근무하게 하자는 등 좋은 정책을 건의한 업적이 있다. 문장가로서도 탁월했고, 성리학의 학문에도 높은 수준에 있었지만 특히 시에 뛰어나 대표적인 시인의 한 사람임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의 문하에서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3당시인인 고죽 최경창, 옥봉 백광훈, 손곡 이달 등 세 시인이 배출되어 시인의 명망으로는 그를 당할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그렇게 높은 시인이었으면서 또 그런 높은 인격으로 남에게 벼슬을 양보하는 ‘지덕’을 지녔으니 얼마나 자랑스럽고 부러운 일인가. 인격이나 능력에서 미치지 못하는 인물들이 선배나 능력자까지 밀쳐내고 높은 자리에만 오르려고 온갖 작태를 부리는 사람들이 가득한 오늘의 세상에서 사암 박순 같은 인격과 능력을 갖춘 사람은 다시 나타나지 않을 것인가. 안타까울 뿐이다. 박순은 전라도 나주 출신이었고 호남을 대표하는 고관의 지위에 올랐던 인물이었다.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ㆍ우석대 석좌교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