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알림

[2030 세상보기] ‘SKY캐슬’에는 있고 우리에겐 없는 것

입력
2019.02.16 04:40
26면
0 0

용도는 각기 다르지만, 모든 공공 공간은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다. 공공 공간은 그 공간을 함께 사용하는 사람들의 교류의 장이 된다. 드라마 ‘SKY캐슬’ 첫 화는 대학에 합격한 아이를 함께 축하하는 입주자들의 연회를 묘사한다. 학부모들이 합격 비결을 알아내기 위해 신경전을 벌이지만, 이 장면은 또한 선후배나 이웃 간으로 연결된 여러 입주자 가족들이 서로의 안부를 묻고 친목을 다지는 장면이기도 하다. 이런 모임을 위한 목적으로 ‘SKY캐슬’에는 연회장이 있다.

현실에서도 최근의 신축 아파트들은 연회장 같은 공간을 두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연회장뿐 아니라 라운지, 수영장, 카페 등을 갖춘 곳도 등장했다. 이런 시설들이 큰 인기를 누리고 있음은 명백하다. 한 경제지는 공공 공간을 갖춘 아파트들이 주거면적이 비슷한 인근 아파트들보다 가격 상승폭이 훨씬 크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다른 한 경제지는 아파트의 가치를 커뮤니티가 좌우한다고도 주장했다. 21세기에도 뚜렷한 비판 의식을 가진 독자들이라면 이와 같은 유행을 달갑게 바라보지만은 않을 것이다. 예컨대 일정 수준의 경제력을 갖춘 상류층만의 폐쇄적 교류를 만든다는 비판이겠다.

내 관점은 조금 다르다. 외국에서 밀집 주거 형태는 대개 서민층을 위한 경우가 많다. 아파트가 유독 우리나라에서 선망의 대상이었던 까닭은 단지 난방이 잘 되고 따뜻한 물이 나오며 신식 변기를 포함한 깨끗한 상하수도 시설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아파트가 이 땅에 처음 등장했던 수십 년 전에는 ‘잘 사는’ 생활의 모델이었지만 이제는 어디라도 마땅히 있어야 하는 시설이다. 공공 공간도 마찬가지다. 다른 곳에는 좀처럼 없는, 그러나 마땅히 있어야 할 시설을 갖추었기에 그 아파트는 고급 아파트가 된다. 요컨대 내 관점은 신축 아파트가 아니라 어디라도 공공 공간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공공 공간들은 단지 만남의 장소를 제공하는 이상의 가치가 있다. 지난 세기 중반 소비에트 러시아에 대거 보급됐던 공동 주택들은 여러 입주자들이 부엌을 공유하는 형태였다. ‘SKY캐슬’의 연회장처럼 화려하지는 않지만, 공용 부엌도 공공 공간이다. 그때 러시아 사람들은 식사를 함께 하면서 음악을 듣거나 시 낭송을 하곤 했다. 이 부엌에서 금지된 음반과 서적들이 알음알음 전파되며 자유의 꿈이 피어났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다시 말해 공공 공간은 교류와 친선을 넘어 민주적 커뮤니케이션의 중심이 될 수 있다.

이웃과 만날 장소가 기껏해야 엘리베이터 정도인 곳에서는 입주자 대표가 관리비를 횡령하는 등의 일이 일어나도 대처하기가 어렵다. 함께 모일 공간이 없으므로 의견 교환이 어렵고, 따라서 여론도 만들어지지 않는다. 민주주의는 일상적으로 만나 비공식적인 이야기가 오고 가는 공간이 있어야 굴러간다. 오랜 옛날에는 마을의 큰 나무 그늘이나 길목의 공터 등이 공공 공간의 역할을 했을 것이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아고라라고 하는 시장 바닥이 그 역할을 했다. 그러나 고도의 도시화가 일어나는 과정에서 이제 공간은 세 가지만 남았다. 휴식 공간(집), 업무 공간(사무실과 작업장), 소비 공간(상점과 식당).

도시에서 사라진 공공 공간의 기능은 소비 공간이 대신한다. 다른 학생들과 함께 토론할 곳이 마땅치 않으므로 붐비는 카페에서 만난다. 다른 직원들과 의견을 나눌 곳이 딱히 없으므로 삼겹살집에서 지옥의 회식을 견딘다. 가족과 나들이할 곳이 가까이 있지 않으므로 불필요한 물건을 사러 쇼핑센터에 간다. 연인과 데이트할 곳이 제한적이므로 홍대에서 연남동으로, 삼청동에서 익선동으로, 뜨는 동네를 유랑한다. 이 모든 삶에 돈이 든다. 공간의 부재는 시민을 단순 소비자로 전락시킨다. 따라서 지금 도시재생의 목적은 소비 공간이 아닌 공공 공간의 확대여야 할 것이다.

손이상 문화운동가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