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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굴뚝 요법

입력
2019.02.14 04:40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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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나지막한 기와집에서는 벌써 저녁밥을 짓는지 굴뚝에서 푸르스름한 연기가 곧게 피어오르고 있다. 하늘과 내통(內通)하는 굴뚝을 볼 때마다 나는 가슴이 두근거린다. 거미줄과 그을음이 덕지덕지 달라붙은 창틀에 올망졸망 매달린 기와집 아이들이 부르는 피리 소리, 어둑어둑 저무는 해질녘의 굴뚝 풍경과 어울려 애틋한 기분을 자아낸다.

이것은 흑백사진 속에나 나오는 농경시대의 풍경이 아니라 십여 년 전 귀촌한 우리 집 풍경. 아이들은 물론 추억 속의 아이들. 우리 부부는 음악을 좋아해 가끔씩 오래된 풍금을 치며 노래하기도 하고, 지금은 성년이 된 딸이 초등생 때 사용하던 피리를 꺼내 동요를 연주하기도 한다. 울어도 울어도 목이 쉬지 않던 천진한 동심이 그리워 피리를 불면 그 소리는 굴뚝의 연기처럼 하늘로 곧장 피어오르는 듯싶다.

이미 사라진 것들이 우리 집엔 아직 꽤 여럿 살아 있다. ㅁ자 집 둘레에 세 개나 되는 굴뚝이 우뚝 솟아 있고, 이끼 낀 돌담이 집을 뺑 둘러싸고 있으며, 옛날 작두펌프도 마당 한가운데에 살아 있다. 내가 가장 애착하는 건 바깥채 화방벽 위로 솟아 있는 굴뚝. 고궁의 굴뚝처럼 폼으로만 있는 굴뚝이 아니라 매일 푸른 연기를 뿜어 올리는 굴뚝들. 옛사람들은 굴뚝을 연문(煙門)이라 불렀다는데, 연기를 쭉쭉 빨아내는 굴뚝이 없으면 방을 덥힐 수 없고 가마솥에 물을 끓일 수도 없다.

하여간 굴뚝은 오래된 한옥에 사는 내 생존과 연관된 소중한 구조물. 사람의 입과 목구멍으로 음식물이 들어가듯이 아궁이에 땐 불길이 굴뚝 쪽으로 빨려 들어가야 우리 식구들이 살 수 있으니까. 따라서 일 년에 한 번씩은 연기가 쭉쭉 잘 빠지도록 그을음이 잔뜩 매달린 굴뚝을 허물어 청소를 해준다. 몇 년 전엔 굴뚝 속으로 새가 들어와 나가지 못하고 푸드득거리는 소리가 들려 굴뚝을 무너뜨려 깃털에 그을음투성이인 새를 꺼내 살린 후 굴뚝을 다시 세운 적도 있다.

꽤 여러 해 전 나는 ‘굴뚝의 정신’이란 제목의 시를 쓴 적이 있는데, 나를 살리고 내 가족을 살리는 굴뚝이야말로 내가 지향해야 할 어떤 정신의 상징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 아직 멀었다/저 우뚝한 굴뚝의 정신에 닿으려면!” 매일 하루 한 번씩 아궁이 앞에 앉아 장작불을 지피는 나는 지금도 저 우뚝한 굴뚝의 정신에 닿을 수 있기를 빈다. 굴뚝의 정신이라니? 타들어가는 아궁이 불길 속으로 질기디 질긴 내 욕망을 태울 수 있게 해주고, 내 안에 잠재되어 있는 분노와 원망과 미움을 살라주는 굴뚝. 지상의 온갖 탐진치(貪瞋癡)에서 자유롭지 못한 나를 불사르고 하늘과 소통하게 해주는 굴뚝.

지금이 어느 땐데 굴뚝 얘기를 하느냐고 하실 분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에겐 굴뚝이 여전히 내 생존의 일부이기에 그렇기도 하지만, 굴뚝에 대한 추억이 살아 있는 시인들에겐 그것이 자기 존재의 상태를 드러내는 유용한 상징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정현종 시인의 ‘굴뚝’이란 시가 그것을 잘 드러낸다.

“내 어깨에는/굴뚝이 하나 있어/열 받거나/가슴에 연기가 가득할 때/그리로 그것들을 내보낸다./어떤 때는 연기가 많이 나고/어떤 때는/빈집 같다.”

시인의 어깨에 우뚝 솟은 굴뚝, 열 받거나 가슴에 연기가 가득할 때 그리로 내보낼 수 있는 굴뚝이라면, 그것은 치유의 한 상징이겠다. 그래서 시인은 둘째 연에서 ‘굴뚝 요법’을 추천한다고 노래한다. 햐, 굴뚝 요법이라! 매일 내가 아궁이 앞에 쭈그리고 앉아 타오르는 불길을 바라보며 덧없는 욕망과 슬픔과 분노와 시름을 사르듯이, 시인은 상상의 굴뚝을 세우고 인생의 고뇌와 슬픔을 스스로 치유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저마다 자기 생의 고통과 슬픔을 치유할 방편을 찾아야 한다.

고진하 목사ㆍ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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