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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즈만 구릉 “돈 벌러 온 한국에서 돈 대신 ‘꿈’을 얻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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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즈만 구릉 “돈 벌러 온 한국에서 돈 대신 ‘꿈’을 얻었습니다”

입력
2019.02.07 15:49
수정
2019.02.07 21:25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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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판 ‘아름다운가게’ 구릉 대표

아름다운가게서 일한 게 계기돼 고국 돌아가 기증물품매장 열어

노점서 시작, 현재 3호점 준비… “10년내 한국보다 번창해야죠”

지난달 29일 서울 중구 아름다운가게 서울본부에서 만난 ‘수카와티 스토어’의 치즈만 구릉 대표. 그가 한국에서 벌어간 것은 ‘꿈’이었다. 김혜윤 인턴기자
지난달 29일 서울 중구 아름다운가게 서울본부에서 만난 ‘수카와티 스토어’의 치즈만 구릉 대표. 그가 한국에서 벌어간 것은 ‘꿈’이었다. 김혜윤 인턴기자

그곳 청년들에게 ‘고향’이란 먹고 살기 위해 등져야 하는 곳이었다. 그도 마찬가지였다. ‘이주노동자’가 되려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조국 네팔을 떠나 한국 땅을 처음 밟았을 때만 해도 몰랐다. 자신이 벌어들인 것은 ‘돈’이 아니라 ‘꿈’일 줄을. “한국에서 일하는 3년 동안 처음으로 꿈이 생겼어요. 언젠가 네팔로 돌아간다면 꼭 이런 가게를 차리고 싶다, 반드시 내 나라에 ‘넘버 원 기증물품 매장’을 만들겠다고요.” 네팔은 이제 등져야 할 고향이 아니라, 새로운 도전의 장이 됐다.

사회적 기업 ‘아름다운가게’의 처음이자 마지막 외국인 직원이었던 치즈만 구릉(46ㆍChijman Gurung)은 그렇게 ‘네팔판 아름다운가게’의 대표가 됐다. 수도 카트만두 시내 한가운데 근사하게 자리잡은 가게 이름은 ‘수카와티(Sukhawati) 스토어’. 수카와티란 산스크리트어로 ‘행복의 땅’이라는 뜻이다. “나눌수록 더 행복하잖아요.” ‘아름다운’이란 수식어만큼이나 따사로운 이름이다.

네팔 ‘수카와티 스토어’ 치즈만 구릉 대표. 김혜윤 인턴기자
네팔 ‘수카와티 스토어’ 치즈만 구릉 대표. 김혜윤 인턴기자

구릉 대표가 ‘아름다운가게’와 인연을 맺은 건 10년 전이다. 당시 아름다운가게가 구릉 대표에게 줄 수 있었던 월급은 원래 다녔던 직장 월급의 절반 수준이었다. 한 푼이 아쉬운 이주노동자 입장에서는 쉽지 않은 선택이다. 하지만 결단은 되려 빨랐다. 네팔의 기억 때문이다. “네팔은 1960년대부터 해외 자선단체로부터 엄청난 지원을 받았지만, 그 지원이 효율적으로 집행되질 못했어요. 해외뿐 인가요. 큰 홍수 같은 게 나면 네팔 국내에서도 적지 않은 기증품들이 모여요. 그런데 진짜 필요한 사람에게 전달되는 경우는 드물었죠. 물품을 중간에서 빼돌려 싼값에 넘겨버리는 업자들이 많았고요. 이 구조를 어떻게 해야 바꿀 수 있을까, 그런 고민이 오랫동안 쌓였는데 그 때 아름다운가게를 만나게 된 거지요.” 구릉 대표에게 아름다운가게란 ‘직장’이 아니라 ‘학교’였다. 공익을 내걸고 중고물품을 기증받고, 중고물품 거래로 낸 이익으로 또 공익을 추구하는 선순환 구조에 흠뻑 빠졌다.

‘네팔판 아름다운가게’를 만들겠다는 부푼 꿈을 안고 2012년 고향으로 돌아갔다.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같이 일할 사람을 찾는 데만도 몇 달이 걸렸어요. 대부분 ‘취지는 좋은데… 아무리 그래도 쓰던 물건을 누가 사겠어’ 이런 식으로 반응했죠.” 귀국 2년 만인 2014년에 첫 가게를 열었다. 초라한 출발이었다. 월세 낼 돈이 없으니 가게를 차린 곳은 길바닥, 그러니까 노점이었다. 9명의 자원봉사자들이 자기 집안을 탈탈 털어 내놓은 물건이 판매물의 전부였다. 오해도 받았다. 열심히 뛰겠다는 욕심에 소수민족 축제 때마다 원정을 다녔지만 몰려든 경찰과 한바탕 입씨름을 벌이는데 들인 시간이 더 많을 때도 있었다. 말 그대로 ‘맨땅의 헤딩’이었는데, 이런 경험이 쌓이면서 이내 어엿한 꼴을 갖춘 ‘가게’가 되어갔다. 고국으로 돌아온 지 3년만인 2015년의 일이었다.

네팔 수도 카트만두 시내에 위치한 수카와티 스토어. 치즈만 구릉 대표 제공.
네팔 수도 카트만두 시내에 위치한 수카와티 스토어. 치즈만 구릉 대표 제공.

가게가 자리잡으면서 들어오는 기증품은 날로 늘었지만, 팔리는 양은 여전히 시원찮았다. 아름다운가게 분류센터에서 배운 노하우를 적극 활용했다. 상태가 좋지 않은 물건은 과감하게 솎아냈다. 가격은 파격적으로 낮췄다. “10루피가 한국돈으로 치면 100원 정도예요. 야채 한 묶음 가격도 안 되는 수준인데, 옷 한 벌을 그렇게 팔았죠.” 싼 값에 좋은 물건을 구할 수 있단 소문이 유튜브 등을 타고 퍼져나갔다. 고객이 먼저 찾기 시작했다. 카트만두에서 한참 떨어진 시골 마을에서도 원정고객이 찾아왔다. 물건이 없어서 못 팔 정도였다. “사러 오시는 분들이 다 사정이 넉넉지 않은 분들이라 다들 그런 말씀을 하세요. 언젠가 내 돈으로 내 마음에 드는 옷 한 벌, 신발 한 켤레를 사는 게 꿈이었는데 수카와티에서 그 꿈을 이룬다고요.”

수카와티 스토어가 가장 획기적으로 바꾼 것은 ‘여성의 삶’이다. 네팔은 힌두 문화권에 속한다. 여자 혼자 집 밖으로 나가는 것조차 어려울 정도다. 형편이 어려운 집에선 딸을 성매매 업소로 팔아 넘기는 경우도 많다. “저는 네팔이 여지껏 최빈국인 게 이것 때문이라 생각해요. 나라의 절반인 여성들이 일을 하게 될 때, 세상 밖으로 나올 때 네팔이 바뀔 수 있다고 믿었죠. 수카와티 초창기 멤버 9명 중 6명이 여자였어요.” 일하는 여성은 하루가 다르게 달라졌다. 자신의 일에 대해 ‘당당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지금도 수카와티 자원봉사자와 직원 중 70% 이상이 여성이다.

길바닥에서 시작했던 수카와티 스토어는 벌써 ‘3호점’을 낼 준비가 한창이다. “네팔 내에 ‘공정 무역’을 내세운 사업체들은 많아요. 좋은 일이긴 한데 공정 무역 제품들을 정작 네팔 사람들은 구입하질 못해요. 해외에서 오는 여행객이나 외국인을 주소비층으로 설정하는 바람에 가격이 비싸거든요.” 수카와티는 달라야 한다. “네팔 내에서 자립적 선순환을 만들어내자는 게 우리 모토예요. 만든 사람도 파는 사람도 네팔인이듯, 그 물건을 사는 사람도 네팔인이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구릉 대표는 올해 아름다운가게로부터 받은 지원금을 통해 네팔 전국에다 수카와티 스토어 지점을 만들 계획이다.

구릉 대표가 꾸는 ‘수카와티의 꿈’은 이제 시작이다. “기증품뿐 아니라 특산물이나 업사이클링 수공예품을 파는 ‘체인’이 되는 것이 목표”라 했다. 더 큰 목표도 있다. “열심히 하면 10년 안에 아름다운가게도 따라 잡을 수 있겠죠?”

박지윤 기자 luce_jyu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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