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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 일본 품질, 중국 가격, 한국 납기

입력
2019.01.18 18:0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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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경제 성공 신화의 숨은 경쟁력 ‘속도’

경직된 주 52시간, 스스로 손발 묶는 것

기업현실 고려 탄력근로 단위기간 늘려야

“전 세계가 인정하는 한중일 경제의 가장 큰 경쟁력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일본은 품질, 중국은 가격, 한국은 바로 ‘납기’입니다.”

글로벌 수출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한 기업인의 단언이다. 마감이 촉박해 도저히 납기를 맞출 수 없는 상황에서도 한국에선 ‘기적’이 만들어진다. 금요일 오후 미국 회사에서 급한 주문이 들어와 월요일 오전에 회의를 한다는 이메일을 전 세계 협력사에 보냈다. 회의에 참석한 이는 얼마나 될까. 한국인밖에 없었다. 이메일을 확인한 담당자는 곧바로 주말 비행기를 타고 미국까지 날아갔다. 이후 이 회사는 한국 기업에만 주문을 줬다. 품질은 일본보다 떨어지고 가격은 중국보다 비싸지만 다급한 납기를 확실하게 보장할 수 있는 곳은 한국뿐이다. 이러한 ‘속도’가 우리가 세계 6위의 수출 대국으로 우뚝 설 수 있었던 배경이다.

동대문 의류시장도 이런 납기의 경쟁력을 확인할 수 있는 현장이다. 다른 나라에선 한 달 이상 걸리는 ‘샘플’ 제작이 동대문에선 사흘이면 가능하다. 3만 곳도 넘는 원단ㆍ부자재ㆍ액세서리ㆍ봉제ㆍ가공 관련 소규모 공장 등이 인근에 밀집돼 있는데다, 밤낮없이 24시간 돌아가기 때문이다. 심야시간 동대문을 찾은 중국 블로거의 인터넷 생방송을 통해 매장 한 곳에서 수억 원의 맞춤 생산 주문이 이뤄질 때도 있다. 속도는 부가가치를 창출한다.

납기는 물류와 공급망 관리의 효율성이 추구되며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 창고에 재고를 쌓아 두는 대신 주문과 동시에 생산과 유통이 이뤄지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빨리빨리’ 문화는 적잖은 부작용도 있지만 모두가 부러워하는 한국 경제의 가공할 무기인 셈이다.

장황하게 이야기를 꺼낸 것은 주 52시간 근무제가 너무 경직되게 운용돼 스스로 우리의 가장 큰 경쟁력을 차버리게 되는 상황이 우려되기 때문이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 일하는 나라라는 오명을 벗고 일과 삶의 균형을 도모하는 것은 시대적 소명이다. 그러나 정책을 시행할 땐 현장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실태부터 파악하는 게 우선이다. 이를 무시한 채 당위만 앞세우다 보면 의도치 않았던 역효과를 부르게 된다. 저소득층의 인간다운 삶을 위한 최저임금 인상이 오히려 일자리 감소로 이어진 아픈 경험을 되새겨야 한다. 지난해 취업자 수 증가 폭(9만7,000명)은 2017년의 30%에 불과했다. 이런 최저임금 인상보다 한국 경제에 더 치명적인 정책이 주 52시간 근무라는 게 중소기업 사장들의 고언이다. 경직된 주 52시간 근무제 적용은 일시적 비용 상승을 넘어 항구적인 경쟁력 약화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속도가 핵심 경쟁력인 업종과 정보기술(IT) 산업, 연구개발(R&D) 부문, 일부 현장 등에는 주 52시간 근무제를 유연하게 적용할 필요가 있다. 금형 사출 작업만 하더라도 예열을 하는 데 통상 10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평상시엔 주 52시간 근무 원칙을 지키면서 납기가 급할 땐 운용의 묘를 발휘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더 많이 일한 부분에 대해선 당연히 그만한 보상이 따르도록 하면 된다. 법정 근로시간을 어겼다고 예외 없이 바로 형사 처벌하는 것은 다른 나라에선 찾아보기 힘든 방식이다. 스스로 우리의 손발을 묶는 어리석은 정책이다. 중국이 쾌재를 부르고 있다는 얘기도 들린다.

관련 법도 단위 기간을 최장 3개월로 한 탄력근로제를 허용하고 있다. 그러나 3개월로는 도저히 법 규정을 준수할 수 없는 업종들이 많다. 인도할 선박의 시험운행에만 최소 6개월이 걸린다. 바다로 나간 배가 3개월마다 항해사를 바꾸려고 귀항할 순 없다. 탄력근로제 단위 기간을 대폭 늘리는 게 경제의 활력을 높이는 길이다. 오죽하면 서정진 셀트리온 회장이 문재인 대통령 앞에서 연구원들은 짐을 싸 들고 집에 가 일한다며 불법 사실을 자백했겠나. 기업은 일을 하고 싶다는데 정부가 이를 막는다면 한국 경제의 앞날은 밝을 수가 없다.

박일근 논설위원 ikpark@hankookilbo.com


※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선보이는 칼럼 ‘메아리’는 <한국일보> 논설위원과 편집국 데스크들의 울림 큰 생각을 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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