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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진실의 입이라도 있다면

입력
2019.01.07 04:40
수정
2019.01.09 10:29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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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로마의 휴일로 유명해진 명소가 있다. 바로 산타마리아 인 코스메딘 성당에 있는 ‘진실의 입’이다. 남자주인공 그레고리 펙이 여자주인공 오드리 햅번을 놀리기 위해 진실의 입에 손을 넣고 마치 손이 잘린 듯 익살을 부린다. 강의 신 홀르비오의 얼굴이 진실의 입이라는 이름을 얻은 것은 중세시대에 진실을 말하지 않으면 손을 잘라도 좋다고 서약한데서 유래한다.

요즘 정국이 진실공방으로 혼란스럽다. 청와대 특감반원의 민간인 사찰로 시작된 공방은 전 기재부 사무관의 적자국채 폭로로 그 정점에 이른 것 같다. 현실에서는 먹고 살기가 힘들고, 미래 먹거리를 위해서는 혁신에 목을 매어야 하는 상황에서 국가적 에너지는 모두 진실공방으로 집중되고 있다.

진실과 거짓을 가르는 출발점은 사실이다. 사실과 진실은 다르다. 사실을 기반으로 누군가의 시각을 통해 투영된 것이 주관적 진실이다. 즉 가치판단이 개입된 사실이라는 것이다. 결국 하나의 사실을 보더라도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에 따라 여러 개의 주관적 진실이 존재할 수 있다. 그래서 형사소송법에서는 실체적 진실이라는 말을 쓰며, 보다 객관화된 진실을 강조한다. 진실은 진리와도 다르다. 진리는 모든 사람이 동의하는 절대적 진실로 오직 하나만 존재한다.

국채상환 중단과 적자국채 발행이라는 사실을 보고 의도적으로 높은 채무비율을 유지하려 한다고 생각한 것은 신 전 사무관의 진실일 수 있으며, 이와 달리 김 전 부총리의 말처럼 재정상 필요성이라는 또 다른 진실이 있을 수 있다. 그러다보니 진실공방에서 중요한 것은 핵심사실을 포함한 주변 사실을 모두 모아 객관화하는 시간과 과정이다. 이를 통해 당시의 목적과 의도를 유추하여 객관화된 진실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의 모습은 객관화된 사실을 모아보는 것 보다는, 사실을 프레임화 하고 감정의 극단으로 치닫는 느낌이다. 포로로 추정되는 쓰러진 아랍군인에게 미군 한 명이 총을 겨누고 나머지 미군들이 그를 부축하여 자신의 수통에 있는 물을 먹이는 전장사진이 있었다. 그런데 같은 사진을 친아랍 언론에서는 총을 겨누는 모습만을 잘라 보도했고, 친미국 언론에서는 그를 부축하며 물을 먹여주고 있는 장면만을 보도했다. 사진을 본 사람들의 반응이 극단이었음은 자명하다. 존재하는 사실에 특정목적을 위해 프레임을 씌우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적자국채 논란을 보는 우리 정치권의 모습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국채상환과 발행은 기재부장관의 업무범위 내 일이다. 일반 가계의 살림과 달리 초과세수가 생겼다고 반드시 국채를 상환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현장에서 재정을 운용하는 사람의 미래예측적 판단에 달려있다. 물론 갑작스러운 이례적 바이백 취소로 시장이 혼란스러웠고 그 과정에서 청와대와 기재부간 혼선이 빚어진 것은 문제였다. 그리고 이는 의혹이 원인이 되었다. 청와대의 개입을 비판하지만, 지금까지 모든 정권을 막론하고 청와대와 정책조율은 있어왔으며 당연히 필요하다. 최종적인 책임은 대통령이 지기 때문이다. 오히려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부처중심이 아닌 청와대 중심의 정책결정이 이루어져온 시스템 문제와 재정운영 결정 과정의 투명성 제고라는 제도개선의 필요성이다.

정부와 여당의 반응은 다소 거칠었다. 신 전 사무관을 곧바로 공무상 비밀 누설죄로 검찰에 고발하거나 인신공격한 것이다. 야당의 대응 역시도 이 사건을 게임체인저로 활용하려는 듯 일부 과장되었다. 신 전 사무관이 주장한 내용도 국익을 해할 만큼 중한 것도 아니었다. 진실의 입이라도 있다면 날선 공방이 당장 멈추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쟁보다는 국회차원의 차분한 대응이다. 객관화된 진실은 뜨거운 의도와 목적이 아닌 차가운 이성을 통할 때 비로소 다가설 수 있기 때문이다.

최승필 한국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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