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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뷰엔] GP의 잔해ㆍ미투 스티커… 흔적으로 남은 2018

입력
2018.12.31 04:40
수정
2018.12.31 09:47
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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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체된 GP] 지난 12일 남북 군사당국이 '9·19 군사분야 합의서' 이행 차원에서 시범 철수한 비무장지대 내 GP에 대해 상호검증에 나선 가운데 강원 철원 중부전선에서 우리측 장병이 완전 파괴된 GP의 잔해 위에 서서 북측을 바라보고 있다. 철원=사진공동취재단
[해체된 GP] 지난 12일 남북 군사당국이 '9·19 군사분야 합의서' 이행 차원에서 시범 철수한 비무장지대 내 GP에 대해 상호검증에 나선 가운데 강원 철원 중부전선에서 우리측 장병이 완전 파괴된 GP의 잔해 위에 서서 북측을 바라보고 있다. 철원=사진공동취재단

환희와 분노가 교차했다. 분단 이후 최초로 판문점에서 손을 맞잡은 남북 정상의 모습이 벅찬 감동을 주었다면 각계에서 들불처럼 번진 ‘#미투’ 운동은 우리 사회의 부끄러운 민낯을 훤히 드러냈다. 사법농단 사태로 법원의 신뢰는 추락했고 경제 현장에선 최저임금 인상, 근로시간 단축을 둘러싼 파열음이 끊임없이 터져 나왔다. 다사다난했던 2018년, 이슈의 현장엔 어김없이 흔적이 남았다.

 ◇DMZ 내 GP의 잔해… 해체된 대결의 상징 

장병은 허물어진 감시초소(GP)의 잔해를 밟고 선 채 말없이 북쪽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이 머문 능선에선 불과 두 달 전까지 총 끝을 마주 겨누던 북한군 GP도 사라지고 없다. 남북이 시범 철거한 GP의 상호검증을 완료한 지난 12일 강원 철원 중부전선 비무장지대(DMZ)의 모습이다. 정전협정 이후 65년간 가장 삼엄하던 남북 대결의 상징은 이렇게 해체되어 역사의 흔적으로 남았다.

돌이켜보면 서곡은 화려했고 과정은 긴박했다. 평창동계올림픽을 계기로 물꼬가 트인 남북 관계는 믿기지 않을 만큼 급진전했고 남북 정상은 분단 이후 최초로 판문점에서 손을 맞잡은 후에도 두 차례나 더 만나 머리를 맞댔다. 구상이 선언으로 발전하고 군사분야 합의가 약속 이행으로 이어지면서 DMZ 내 GP는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를 향한 발걸음은 국제 정세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 속도를 현저히 늦추고 있다. 기약 없어진 김정은 위원장의 서울 답방, 갈 길 먼 북미협상 등 숱한 난제를 남겨둔 채 숨가빴던 2018년이 기울고 있다.

[해체된 GP] 남북 군사당국이 지난 12일 '9·19 군사분야 합의서' 이행 차원에서 시범 철수한 비무장지대 내 GP에 대해 상호검증에 나선 가운데 강원 철원 중부전선에서 우리측 검증반이 완전 파괴된 북측 GP를 검증하고 있다. 철원=사진공동취재단
[해체된 GP] 남북 군사당국이 지난 12일 '9·19 군사분야 합의서' 이행 차원에서 시범 철수한 비무장지대 내 GP에 대해 상호검증에 나선 가운데 강원 철원 중부전선에서 우리측 검증반이 완전 파괴된 북측 GP를 검증하고 있다. 철원=사진공동취재단
[한국서부발전] 고 김용균씨의 일터이자 그의 목숨을 앗아간 충남 태안군 한국서부발전 태안발전소 후문 앞의 28일 모습. 굴뚝에서 연기가 쉴새 없이 뿜어져 나오는 가운데 철망에 김씨를 추모하는 검은색 배너가 매달려 있다.
[한국서부발전] 고 김용균씨의 일터이자 그의 목숨을 앗아간 충남 태안군 한국서부발전 태안발전소 후문 앞의 28일 모습. 굴뚝에서 연기가 쉴새 없이 뿜어져 나오는 가운데 철망에 김씨를 추모하는 검은색 배너가 매달려 있다.

 ◇위험의 외주화를 멈추라! 

컨베이어벨트를 멈춰라! 28일 충남 태안군 한국서부발전 태안발전소 후문 앞에 고 김용균씨를 추모하는 배너가 매달려 있다. 24세 청년은 지난 11일 컨베이어벨트에 끼여 목숨을 잃었다. 그는 입사 3개월 차 비정규직이었다. 위험한 작업을 하청업체에 떠넘긴 발전소는 사고 발생 후에도 컨베이어벨트를 멈추지 않았다. 국회가 뒤늦게 위험 작업의 사내 도급을 금지하는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을 통과시켰지만 노동계는 ‘철저한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 ‘상시 지속 업무 노동자의 직접 고용 정규직 전환’만이 비극을 막을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들불처럼 번진 #미투 

올해 초 ‘#미투’ 운동이 급격히 확산했다. 문화, 예술계를 비롯해 정치권과 교육 현장까지, 피해자의 증언은 잇따랐다. 특히, 학생들이 교사 및 교수의 성추행 사실을 대자보와 포스트잇, SNS를 통해 털어놓기 시작하면서 ‘#스쿨미투’가 공론화됐다. 그러나 법과 정의의 응답은 기대에 못 미쳤다. 대부분 솜방망이식 징계에 그치거나 그조차 이루어지지 않았다. 지속적인 폭언과 성추행 등으로 미투 의혹이 제기된 한 대학 교수는 1년이 되도록 아무런 처분을 받지 않고 있다. 그의 연구실 출입문에 훼손된 채 붙어 있는 #미투 스티커는 성차별적 사회 구조의 변화를 요구하는 시대의 외침이다.

[교수 연구실 앞 #미투 스티커] 29일 학생들에게 지속적인 폭언과 성추행 등으로 미투 의혹이 제기된 서울시내 한 대학 교수의 연구실 앞에 #미투 스티커가 훼손된 채 붙어 있다.
[교수 연구실 앞 #미투 스티커] 29일 학생들에게 지속적인 폭언과 성추행 등으로 미투 의혹이 제기된 서울시내 한 대학 교수의 연구실 앞에 #미투 스티커가 훼손된 채 붙어 있다.
[대법원 앞 농성장] 27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 농성 천막에 사법농단과 양승태 전 대법원장을 규탄하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
[대법원 앞 농성장] 27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 농성 천막에 사법농단과 양승태 전 대법원장을 규탄하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

 ◇사법농단 사태로 무너진 사법 신뢰 

농단의 근원은 법원 내부 깊숙이 뿌리내려 있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이루어진 사법행정권 남용에 대한 의혹은 법원에 대한 검찰 수사라는 사상 초유의 사태로 이어졌고, 전직 대법관과 현직 판사가 포토라인에 서는 수모를 당했다. 수사 과정에서 청와대와의 재판 거래, 판사 사찰, 일선 재판부에 압력 행사 등 의혹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지만 법원은 영장을 잇따라 기각해 자정 의지마저 의심받기 이르렀다.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 농성장에 내걸린 사법 전횡 규탄 현수막에는 무너진 신뢰의 표본이 된 사법부의 현실이자 올 한 해 들끓었던 국민적 분노가 담겨 있다.

 ◇손자국만 빼곡한 계산기… 자영업의 몰락 

서울 중구 한 음식점의 낡은 계산 단말기(포스) 화면. 손자국은 빼곡한데 테이블 별 주문 내역은 텅 비어 있다. 자영업자의 한 해는 고단했다. 여전히 암울한 전망 속, 그 한숨의 깊이를 어떻게 가늠할 수 있을까. 분노한 이들은 최저시급 인상을 노려보고 있지만 오롯이 그 탓만으로 돌릴 수는 없어 보인다. 내수시장 침체와 과밀 과당 경쟁, 치솟는 임대료, 프랜차이즈 본사의 ‘갑질’ 등 자영업자를 짓누르는 요인은 너무 많고 개선도 되지 않고 있다. 2017년 기준 자영업자는 총 568만여명. 이 중 올해 100만명이 폐업할 것으로 추정된다.

[자영업자의 몰락] 27일 서울 중구의 한 음식점에 설치된 계산용 단말기(포스)의 터치 스크린. 테이블별 주문 내역이 비어 있는 화면 위로 손자국만 빼곡하다.
[자영업자의 몰락] 27일 서울 중구의 한 음식점에 설치된 계산용 단말기(포스)의 터치 스크린. 테이블별 주문 내역이 비어 있는 화면 위로 손자국만 빼곡하다.
[화장실 몰카 공포] 서울시내 한 대학교 내 여자화장실 출입문에 지난달 25일 ‘몰카 OUT’ 스티커가 덕지덕지 붙어 있다.
[화장실 몰카 공포] 서울시내 한 대학교 내 여자화장실 출입문에 지난달 25일 ‘몰카 OUT’ 스티커가 덕지덕지 붙어 있다.

 ◇여자 화장실에 붙은 스티커, ‘몰카’ 구멍을 막아라 

이른바 ‘몰카 공포’가 전국을 휩쓸었다. 남의 몸을 몰래 촬영해 유통하려는 위험한 시도는 학교와 사무실, 지하철역과 고속도로 휴게소 등 전국의 여자 화장실 곳곳에 무수한 구멍을 냈다. 여성들은 진화하는 몰래카메라의 성능과 교묘한 범죄 수법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휴지로, 스티커로 구멍을 메워나갔다. 가장 안전해야 할 공간에서 벌어진 폭력과 그에 대한 항거, ‘몰카 OUT’ 스티커가 한 해를 되돌아보는 흔적으로 남은 현실은 서글프다. 사진은 서울시내 한 대학교 여자 화장실.

 ◇아듀 올림픽, 평창의 ‘일장춘몽’ 

평창동계올림픽은 유치 과정부터 경기장 건립 예산과 사후 처리 등 논란을 안고 있었다. 다행히 남북 관계 개선의 물꼬를 트며 이 같은 문제는 잠시 뒤로 밀렸다. 그러나 올림픽의 열기가 사라진 지 10개월, 예견된 문제는 현실이 됐다. 경기장 대다수가 활용 방안을 찾지 못해 방치돼 있거나 정부와 강원도 사이에 경기장 존치 여부를 둘러싼 갈등이 깊어 가고 있다. 영광의 주역이던 선수들 역시 무관심 속에 또다시 잊혔다. 올림픽 엠블럼이 1년째 내걸려 있는 강원 평창군 진부면의 한 폐건물이 6일 ‘일장춘몽’ 같았던 평창올림픽의 영광을 증언하며 쓸쓸히 서 있다.

[평창의 ‘일장춘몽’] 지난 6일 강원 평창군 진부면에 위치한 한 폐 건물에 평창동계올림픽 홍보 엠블럼이 거창하게 내걸려 있다. 올림픽을 앞두고 미관상 걸어둔 것으로 보이는 엠블럼이 올림픽이 끝난 지 10개월이 지나도록 방치돼 있어 흉물스러움을 더한다.
[평창의 ‘일장춘몽’] 지난 6일 강원 평창군 진부면에 위치한 한 폐 건물에 평창동계올림픽 홍보 엠블럼이 거창하게 내걸려 있다. 올림픽을 앞두고 미관상 걸어둔 것으로 보이는 엠블럼이 올림픽이 끝난 지 10개월이 지나도록 방치돼 있어 흉물스러움을 더한다.
[사립 유치원 비리] 사립 유치원 비리가 드러난 이후 느닷없이 폐원 신청을 한 서울시내 한 사립 유치원 앞에 28일 원생들이 쓴 그림 편지가 붙어 있다. “유치원이 안 없어졌으면 좋겠어요”라고 적힌 문구가 눈에 띈다.
[사립 유치원 비리] 사립 유치원 비리가 드러난 이후 느닷없이 폐원 신청을 한 서울시내 한 사립 유치원 앞에 28일 원생들이 쓴 그림 편지가 붙어 있다. “유치원이 안 없어졌으면 좋겠어요”라고 적힌 문구가 눈에 띈다.

 ◇원장 선생님은 정말 아플까… 사립유치원 비리 

원비를 사적인 용도로 쓰는 등 사립 유치원 비리가 드러나면서 국민적 공분이 일었다. 정치권이 사립 유치원 비리 근절을 위한 ‘유치원 3법’을 추진하자 사립 유치원들은 폐원도 불사하겠다며 맞섰고 연내 법안 통과는 무산되고 말았다. 현재 원장의 건강상 이유 등을 내세워 폐원을 신청한 사립 유치원은 총 106곳, 갑작스럽고 일방적인 통보에 학부모들은 발만 동동 구를 뿐이다. 폐원을 통보한 서울시내 한 사립 유치원 앞에 28일 원생들의 그림 편지가 걸려 있다. “원장 선생님 아프지 마세요”라고 쓴 아이들의 순수한 마음이 더욱 안쓰러운 연말이다.

[쌍둥이 자매가 남긴 흔적] 숙명여고 사건을 수사한 경찰이 쌍둥이 자매의 혐의를 입증할 증거로 공개한 시험지. 깨알 같은 글씨로 적어 둔 정답표의 흔적이 희미하게 보인다.
[쌍둥이 자매가 남긴 흔적] 숙명여고 사건을 수사한 경찰이 쌍둥이 자매의 혐의를 입증할 증거로 공개한 시험지. 깨알 같은 글씨로 적어 둔 정답표의 흔적이 희미하게 보인다.

 

 ◇시험지에 남은 몰 양심의 흔적, 숙명여고 사태 

교사 아버지가 쌍둥이 자매에게 시험 문제와 정답을 사전에 알려 주고 높은 성적을 받게 한 ‘숙명여고 사건’은 학교에 대한 학생과 학부모의 신뢰를 무너뜨린 ‘사태’로 번졌다. 논란 속에 시작된 경찰 수사에서 아버지와 딸들은 혐의를 부인했으나 시험지와 암기장 등에 남겨 둔 정답표의 흔적이 결정적 증거가 됐다. 결국 아버지는 파면, 딸들은 퇴학 처리됐지만 이번 사태가 우리 사회의 고질적인 서열주의와 입시 과열이 부른 부작용이라는 점은 씁쓸하다. ‘제2의 숙명여고 사태’를 막기 위한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해 보인다.

박서강 기자 pindropper@hankookilbo.com

김주성 기자 poem@hankookilbo.com

김주영 기자 will@hankookilbo.com

김혜윤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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