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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월회 칼럼] 대학다움의 타락

입력
2018.12.18 04:40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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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년만이란다. 방송 편성의 독립과 자유를 보장하는 방송법 조항이 제정된 후 이 법으로 처벌된 자가 생긴 것이 말이다. 지난 14일 KBS 세월호 보도 개입 혐의로 기소되어 징역 1년의 실형을 받은 이정현 의원 이야기다.

그는 이번 1심 판결을 두고 정치보복이라는 전가의 보도를 꺼내들었다. 청와대 재직 시절 자행했던 언론 개입은 정당했고, 법원이 객관적 사실과 법률에 의거하여 내린 판결은 부정하다고 우긴 것이다. 과연 우리나라의 국회의원, 정치인답다고 아니할 수 없다.

얼마 전 필자는 한 기업인으로부터 교수답지 않다는 얘기를 들었다. 속에선 황당함이 불끈 솟구쳤지만 겉으론 태연한 척 애썼다. 그러나 겉 다르고 속 다르게 굶에 젬병인지라 불쾌해 하는 기색이 이내 읽혔다. 그러자 기업인이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교수님, 교수답지 않다는 말은 칭찬이에요, 칭찬!” 순간 나도 모르게 소리 내어 웃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크게 웃어졌다.

맞다. 언제부턴가 ‘교수답다’는 표현은 부정적 의미로 소비되고 있었다. 교수가 갑질이나 꼰대 같은 말들과 다반사로 붙어 쓰이니 그럴 만도 했다. ‘교수=괴수’란 표현마저 생기지 않았던가. 사실 지성인이나 학자, 교육자 같은 교수의 본령은 곁다리가 되고, 대학이란 교육행정 기구에 소속된 교원이라는 정체성이 주가 된 지는 이미 오래다. 앎과 삶의 스승보다는 실험실이나 연구실의 ‘상사’로 스스로를 전락시킨 교수도 적지 않다. 정치인답다가 역설적으로 참된 정치인을 환기하듯 교수답지 않음이 참된 교수다움을 가리키는 ‘웃픈’ 현실이 대학의 일상이 됐음이다.

대학의 죽음이 운위됨은 그래서 사뭇 두렵다. 지난 날 대학은 평등이 도모되고 자유가 숨 쉬며 진리가 행세하던 공간이었다. 이것이 ‘대학다움’의 기본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대학은 사회적 불평등이 점철된 공간, 자유가 옥죄이는 공간, 진리가 왕따 당하는 공간으로 전락됐다. 학문 연구와 전인교육 같은 대학의 본질은 얼추 개에게 던져졌고, 재단이 우선되고 정부가 갑질하며 행정이 좌우하는 기관으로 변질됐다. 근시안적 조치가 난무하고 국부적 시각이 횡행하며 교육 연구의 비전문가가 판쳐도 문제 되지 않는 조직으로 타락했다. 대학이 사회의 변소가 된 듯 역한 기운이 스멀대는 공간이 되었다.

대학다움이 그렇게 소실되면서 대학은 거의 취업학교가 되었다. 높은 취업률, 기능적 교육역량, 정량적 연구생산성 등이 대학다움의 핵심으로 자리 잡았다. 문제는 이러한 대학다움에서 볼 때 오늘날 대학은 가성비가 무척 낮은, 다시 말해 비싼 등록금에 비해 높은 취업률은 별로 보장되지 않은 존재라는 점이다. 그럼에도 온 나라가 여전히 대학입시 때문에 홍역을 앓는다. 4년간 들이는 등록금과 제반 부대비용으로 취업교육을 전문적으로 받는다면 훨씬 나은 역량을 갖출 수 있음에도 기어코 대학에 보내려 한다. 대학이 우리 사회서 지니는 프리미엄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그 값어치가 앞으로 얼마나 발휘될지는 마냥 회의적이다.

더구나 모든 대학이 사회 변화에 맞춰가면서 그때그때 산업계가 요구하는 바에 따라 교육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교육을 목표로 삼은 대학이라 할지라도 반드시 ‘기초 지력(智力)’을 동시에 길러줘야 한다. 그러니까 취업 후 변화하는 시대 상황에 맞춰 새로운 직무 능력을 익혀야 할 때, 기존의 직무 능력과 상반되는 바가 요청되어도 이를 제대로 습득하고 창의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을 구비케 해야 한다.

또한 대학은 ‘문제 구성 역량’을 갖춰주는 곳이어야 한다. 문제 해결 역량만을 키우는 곳이어선 안 된다. 문제 해결 능력은 비유컨대 기존 매뉴얼대로 일을 잘 처리하는 능력이다. 이에 비해 문제 구성 능력은 기존 매뉴얼을 갱신해갈 수 있는, 그래서 새로운 매뉴얼을 지속적으로 생산할 줄 아는 능력이다. 동시에 그것은 아직 드러나진 않았지만 언제든 문제될 수 있는 바를 미연에 찾아내고, 그 적절한 해결방안을 앞서 마련할 수 있는 역량이기도 하다. 이런 면에서 문제 구성 역량은 현실 개선 능력이자 미래 구성 능력이기도 하다. 대학에서 전공 불문하고 기초교양, 도구과목, 전공교육 등을 행하며 전인교육을 꾀하는 까닭이 바로 이것이다.

대학의 죽음은, 대학이 이러한 기본을 온전히 실현하지 못했기에 초래된 결과다. 더구나 “교수답지 않다”가 칭찬이 됨은 교수다움의 파괴가 교수 자신으로부터 비롯됐음을 시사해주기에 한층 고통스럽다. 정치인이 정치를, 언론인이 언론을 내부로부터 무너뜨리고 있듯이 교수가, 그렇기에 대학이 내부로부터 무너지고 있음을 시사해주기에 그렇다.

뒤늦게나마 정치권력의 언론 개입에 법적 처벌이 행해졌다. 담당판사의 말처럼 우리 사회의 낙후성이 극복될 수 있는 발걸음이 내딛어진 것이다. 다만 정치권력의 언론 개입은 그렇게라도 처벌되었는데 언론인의 언론다움 파괴는 과연 어찌해야 할지, 마찬가지로 대학다움을 파괴하는 대학은 또 교수는 어찌해야 옳을지, 사뭇 답답해지는 대목이다.

김월회 서울대 중어중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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