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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조각난 가을

입력
2018.11.28 04:40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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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앞 스크린을 봤다. 내 사건 앞으로 소위 나홀로 소송이 많다. 당사자들이 출석하는 사건은 변호사가 있는 사건보다 시간이 많이 걸린다. 분위기와 사건 수로 대충 가늠해 보니 적어도 삼십 분은 기다려야 할 것 같다.

변호사는 대기 시간이 긴 직업이다. 제각기 자기 사건을 기다리며 시간을 보내는 요령들이 있는 것 같다. 보통은 사건 기록을 다시 본다. 다른 사건 기록을 가져와 보는 경우도 있다. 명상집이나 종교서적을 들고 있는 변호사도 몇 번 본 적이 있다.

나는 대기 시간이 길어지겠다 싶으면 바둑 문제를 푼다. 법정에서 대기하는 시간만큼 기력(棋力)이 느는 것 같다. 법정에 들어가 보니 오늘은 딱 실력향상의 날이다. 대리인이 없는 당사자들이 많고, 재판장님은 친절하시다. 이러면 사건이 많이 밀린다.

주섬주섬 사활(死活) 문제집을 꺼내는데, 바삭 소리가 났다.

올가을은 아주 아름다웠다. 가는 곳마다 단풍이 다채롭고 화려했고, 하늘도 청명해 이리저리 다니는 재미가 났다. 조경이 잘 되어 있고 나무가 오래 자란 법원을 간 날에는 법원과 검찰청 주위를 일없이 한 바퀴 돌기도 했다. 외근이 많은 직업의 피로를 꽤 잊을 수 있었다.

단풍이 한창이던 어느 날, 지방 재판을 간 법원에서 단풍 색이 참 예쁘다 하며 작정하고 몇 잎을 색깔과 모양별로 골라 문제집 사이에 끼워 놓았었다. 문제집 말고는 달리 당장 단풍잎을 끼워 말릴 데가 없었다. 그런데 그러고 깜박 잊어버렸다. 이리저리 다니며 사활책을 꺼냈다 넣었다 하던 중에 책등을 위로 하여 가방에 넣었던 모양이다. 그다지 두껍지 않은데다 여러 번 접었다 폈다 한 책이라, 책장이 바닥 쪽으로 벌어지며 마른 단풍잎이 가방 바닥으로 떨어졌던 것 같다. 뒤늦게 가방을 들여다보니, 가방 바닥에 빨갛고 노란 조각들이 흩어져 있다.

법정은 조용한 공간이다. 나는 당사자석에 선 사람들이 언성을 높인 틈을 타 가방을 들어 올려 바닥을 주섬주섬 손으로 훑었다. 손끝으로 이미 새끼손톱만한 크기로 바스러진 단풍잎들이 느껴진다. 사활책을 펴 보니 책장 사이에는 노란 단풍잎의 줄기만 폐가의 철근처럼 볼품없이 남아 있다. 차라리 줄기도 다 부스러져 안 본 편이 나았겠다 싶은 처참한 꼴이었다. 붉은 단풍잎은 손가락이 두 개 날아갔다. 괜히 가슴이 아팠다. 이럴 거면 왜 굳이 주웠을까. 단풍잎을 주운 날, 두껍고 무거운 책으로 제때 옮겨 놓을 걸.

돌이켜보니 그 생각을 안 했던 게 아니다. 두어 번 생각이 났었다. 단풍을 주운 날에도 사무실에 돌아가면 옮겨 놓아야지 했었고, 그 다음 언젠가 법정에서 사활 문제를 푼 날에도, 단풍잎을 보고는 이거 어디 다른 데로 옮기지 않으면 잃어버리겠다는 생각을 잠깐 했었다. 그저 일과 일 사이를 허겁지겁 달리다가, 말린 단풍잎을 제대로 보관해야겠다는 생각도 다른 많은, 아름답지만 다급하지 않은 일들과 함께 길에 흘렸던 것이다. 그리고 결국 이 꼴이었다. 나는 가방 바닥에 남은 단풍잎 조각을 덧없이 그러모았다. 단풍이 아니라 가방 바닥에 생긴 얼룩 같았다. 얇고 작은 조각이니 바닥에서 잘 떨어지지도 않았다. 더 늦기 전에 잘 떼어내 닦지 않으면 정말 얼룩이 되어 버리겠지.

나는 단풍잎 조각을 모아 붙여 보겠다는 덧없는 기대를 버리고, 가방을 조용히 내려놓았다. 멀쩡하던 단풍잎을 내가 죽인 것 같은 기분이었다. 사활 문제를 풀 기분도 들지 않았다. 나는 책장에 애매하게 말라붙은 잎줄기며 조금 큰 조각들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책목 쪽으로 단단히 밀어 넣고 사활책을 덮었다. 남은 잎은 다음에 버리든가 옮기든가 하자. 다음에. 어쩌면 올 겨울에, 어쩌면 가방 바닥에 얼룩이 생긴 다음에, 어쩌면 내년 가을에.

정소연 SF소설가ㆍ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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