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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 가해자를 위한 법, 피해자를 위한 법

입력
2018.11.23 18:0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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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의 ‘과잉 정상참작’에 피해자 2차 고통

靑 청원게시판에는 ‘처벌강화’ 요구 봇물

‘가짜 뉴스’ 우려 있지만 청원 뜻 살펴야

PC방 아르바이트생을 살해한 혐의로 구속된 피의자 김성수가 21일 오전 서울 양천경찰서에서 서울남부지방검찰청으로 송치되던 중 취재진의 질문을 받고 있다. 뉴시스
PC방 아르바이트생을 살해한 혐의로 구속된 피의자 김성수가 21일 오전 서울 양천경찰서에서 서울남부지방검찰청으로 송치되던 중 취재진의 질문을 받고 있다. 뉴시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 기능을 두고 말들이 많다. 성별 혐오를 조장한 이수역 폭행사건 청원이 불을 댕겼다. ‘화장을 하지 않고 머리가 짧다는 이유만으로 여성 피해자 2명이 남자 5명에게 폭행을 당했다’는 이 청원은 여혐ㆍ남혐 공방을 불렀지만, 경찰 조사결과 다툼 과정에서 성혐오성 발언은 없었던 것으로 결론이 났다.

요즘 게시판을 뜨겁게 달구는 청원 대다수가 ‘처벌 강화’에 초점을 맞추는 것 역시 이런 ‘가짜 뉴스’의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우려가 많다. 피해자 일방의 시각에서 여론 재판을 할 소지가 다분하다는 것이다.

부작용이 꽤 심각하고 보완책 마련이 필요하다는데 동의하지만, 한 가지 다르게 생각하는 지점이 있다. 법치국가에서 ‘가해자를 제대로 처벌해 달라’는 청원이 봇물을 이루고 동의 댓글이 수십만 건 달리는 건, 팩트의 옳고 그름을 떠나 되짚어 봐야 할 메시지가 적지 않다는 점이다. 국민들은 법의 잣대를 신뢰하지 못한다는 얘기다.

경남 거제에서 폐지를 줍던 왜소한 체구의 50대 여성이 스무 살 청년에게 무차별적으로 폭행을 당하는 폐쇄회로(CC)TV 동영상을 본 이들이라면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때리고 때리고, 또 때렸다. 숨을 쉬고 있음을 확인하고 또 때렸다. 무릎을 꿇고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어머니뻘 여성을.

그런데 경찰이 그에게 적용한 혐의는 살인죄가 아닌 상해치사죄였다. 그 청년이 여성을 죽일 의도는 없었다는 이유라고 했다. 무슨 근거로 이런 판단을 했는지는 도무지 알 수 없다. ‘사람을 살해한 자는 사형,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형법 제250조ㆍ살인)와 ‘사람의 신체를 상해하여 사망에 이르게 한 자는 3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형법 제259조1항ㆍ상해치사)의 간극은 어마어마하다. 같은 죽음을 두고도 극단적으로는 사형과 집행유예로 갈릴 수 있다는 얘기다. 청원으로 국민적 공분이 일지 않았다면 어쩌면 검찰이 살인죄로 변경하는 일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서울 강서구 PC방에서 아르바이트생을 무참히 살해한 피의자 김성수는 우울증 진단서를 수사기관에 제출했다. 정상이 아닌 상황에서 저지른 범행이니 형량을 낮춰달라는 이야기였을 것이다. 법무부가 정신감정 후 “심신미약 상태가 아니다”는 결론을 내린 건 다행이지만, 화가 치미는 이런 질문이 맴돈다. 그래서 그가 우울증이었고 심신미약이었으면, 정말 정상 참작을 해 줘야 돼?

형법 제10조(심신장애인)는 술에 취한 것조차 형을 감경할 수 있는 심신장애로 치부한다. “취해서 잘 기억이 안 난다”는 범죄자들의 한결 같은 레퍼토리는 법의 이런 ‘과잉 정상 참작’에 어떻게든 편승해 보려는 학습효과일 것이다. 청소년, 그리고 촉법소년(10~14세 형사미성년자)들의 범죄가 갈수록 흉악해지는 것 또한 법이 그들이 저지른 범죄에 비해 과도한 관용을 베풀고 있기 때문일지 모른다.

‘처벌 강화’를 외치는 청원들이 던지는 공통된 질문이 있다. 과연 법이 피해자를 위한 것인지, 혹시 가해자를 위한 것은 아닌지. 피해자와 그 가족의 삶은 송두리째 허물어졌는데, 술에 취해서, 우울증이 있어서, 미성년자여서, 혹은 살해 의도는 없었으니까 형량을 줄여 주는 게 과연 합당하냐는 것이다. 누구나 피해 당사자가 된다면, “나는 용서할 수 없는데 법이 왜 제멋대로 용서를 해 주느냐”고 울부짖을 일 아닌가.

20만명 이상의 동의를 얻어 청와대 답변을 기다리고 있는 청원 중에는 2008년 여덟 살 나영(가명)이를 잔혹하게 성폭행하고 심각한 상해를 입히고도 심신미약을 이유로 1심(징역 15년)보다 형을 감경(12년)받은 조두순의 내후년(나영이가 겨우 스무 살이 되는 해다) 출소를 반대한다는 청원이 있다. 이들이라고 형기를 채운 조두순의 출소를 막을 방법이 없음을 모를 리 없다. 가해자 인권 쪽으로 과도하게 기운 법의 균형추를 바로잡지 않으면 피해자들은 2차, 3차 고통을 겪을 수 있다는 절절한 요구일 것이다.

이영태 정책사회부장 yt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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