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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아버지들의 기록

입력
2018.10.18 18:19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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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가까이에 그토록 중요한 시설이 있었다니!” 얼마 전 있었던 저유소 화재 사건을 접하고 처음 든 생각이었다. 막연히 석유 관련 시설은 항구 근처나 외딴 곳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바로 지척에 있을 줄은 몰랐다. 석유를 저장하는 시설이라고 하니 마포석유비축기지가 떠올랐다. 2014년에 현상설계가 발표되면서 시설물 사진이 공개되었을 때 규모에 놀랐고 이런 시설이 상암동이라는 가까운 곳에 있었음에도 여태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에 더더욱 놀랐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문화비축기지라는 이름으로 시민들을 위한 시설로 바뀌었다. 작년에 개관한 후 다양한 문화행사가 열리지만 여태 가보지 못했는데 이번 사건으로 호기심이 생겼다.

마포석유비축기지는 1970년대에 벌어진 오일쇼크와 발생할지 모르는 전쟁 등에 대비해 필요한 석유를 저장해두기 위해 만들어졌다. 일급보안시설이었기에 41년간 일반인의 출입이 철저히 통제되었다. 다섯 개의 비축 탱크가 마치 산등성이에 푹 파묻힌 것처럼 지어진 것도 그렇지만 야산으로 둘러싼 채로 초소를 두어 엄격하게 관리했다. 월드컵 경기장이 인접해서 지어지게 되면서 비축된 석유는 이송하고 시설만 남게 되었다.

산업유산 투어가 있어서 가이드의 강의와 안내로 시설을 돌아볼 수 있었다. 얼마나 중요한 시설이었으며 어떻게 바뀌었나 살피는 것도 좋았지만, 내가 가장 깊이 감동을 받은 것은 실제 이곳에서 일했던 사람들의 사연이었다. 무척 외진 곳이라서 순찰을 돌 때 공포에 떨기도 했다는 이야기, 정전기 스파크에도 불이 붙을 수 있는 휘발유가 저장된 1번 탱크를 점검할 때는 몇 배나 더 긴장했다는 이야기. 겨울에 눈이 쌓이거나 얼음이 얼면 철제계단이 미끄러워 추락 위험을 감수해야 했던 이야기, 바로 옆에서 쌓아 올라가는 난지도의 악취 때문에 식사 때마다 어려움을 겪었던 이야기, 국가 중요시설을 지킨다는 긍지에 대한 이야기. 봄날 가족초청 행사를 치렀던 행복했던 이야기, 소방안전 훈련대회를 그토록 열심히 했던 이야기… 시설을 둘러보는 내내 그 이야기들이 머릿속을 맴돌며 눈앞에 옛 장면들이 펼쳐지는 것 같았다.

그 당시 사진들도 볼 수 있었는데, 나는 어느 직원이 가족들과 함께 이곳 잔디밭에서 찍은 사진을 보고 뭉클해졌다. 어릴 적 보았던 아버지의 사진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회사에서 동료들과 찍은 사진이었다. 사진을 볼 때마다 그곳은 어떤 곳일까, 늘 궁금했다. 회사에 갔다 오면 뭔가 맛있는걸 들고 오시던 아버지. 아버지의 회사는 맛있는 게 뚝딱 나오는 마법의 성 같았다. 내가 자라면서 아버지로부터 현실적인 이야기를 듣기는 했지만 그때 그 느낌은 여전히 남아있다.

마지막 탱크에는 문화비축기지를 만들면서 참여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있었다. 설계자, 건축 시공자, 설비 시공자, 참여 공무원 등 프로젝트에 참가한 다양한 사람들의 인터뷰와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건물이 어떻게 완성되었는지 뒷이야기를 들어보는 재미도 있지만 프로젝트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의 목소리를 전시한다는 것이 뭉클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만든 공간입니다, 라고 말하고 있었다. 보통 공공문화시설은 당시 시장이나 책임자의 이름만 크게 기록된 경우가 많다. 하지만 건물은 그렇지 않다. 역할이 아무리 작더라도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의 노력 없이 공간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지난 산업시대의 발전도 어느 대통령 한 사람의 공이 아니라 우리 아버지, 어머니들의 노력으로 비롯되었다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과거의 석유비축기지에서 일했던 아버지들의 이야기가 이곳의 훌륭한 문화유산이 된 것처럼, 한 시대를 열심히 살아낸 보통사람들의 이야기를 소중히 담아낼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고민해보게 된다.

정구원 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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