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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배지서 돌아오다 사도세자가 심은 나무 정돈, 정조 마음 더 사로잡다

입력
2018.10.18 04:40
2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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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영괴대도, 오른쪽 사진은 영괴대 부분을 확대한 사진. 풍성하게 자란 홰나무를 강조해 그려둔 것이 인상적이다. 사도세자가 살아생전 드물게 자유를 만끽한 곳이다. 사도세자 사후 버려져 있던 것을 발견한 다산의 지적으로 새롭게 단장됐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영괴대도, 오른쪽 사진은 영괴대 부분을 확대한 사진. 풍성하게 자란 홰나무를 강조해 그려둔 것이 인상적이다. 사도세자가 살아생전 드물게 자유를 만끽한 곳이다. 사도세자 사후 버려져 있던 것을 발견한 다산의 지적으로 새롭게 단장됐다.

 ◇예문관 검열을 사직하다 

1790년 1월19일, 정조는 이전 해 10월에 물러났던 채제공을 좌의정에 다시 앉혔다. 그리고는 2월7일, 그와 함께 다시 수원으로 행차하여 전 해에 이장한 아버지 사도세자가 묻힌 현륭원을 참배했다. 변화의 기운이 무르익고 있었다. 노론들이 바짝 긴장했다.

1789년과 1790년, 조선 교회의 특사 윤유일이 두 차례에 걸쳐 북경을 오가는 사이에 다산은 드러나지 않게 교회 일을 살폈다. 그 와중에 초계문신으로 시험을 치르고, 1789년 주교(舟橋), 즉 배다리 설계에도 참여했다.

다산은 1790년 2월 말, 희정당에서 치러진 한림소시(翰林召試)에 뽑혀 예문관 검열(檢閱)에 단독으로 추천되었다. 예문관 검열은 정 9품이나, 승지와 함께 왕의 측근을 지키면서 왕명을 대필하고 사실(史實)을 기록하는 사신(史臣)으로, 이른바 학문과 덕망이 높은 사람만 앉을 수 있는 청요직(淸要職)에 해당했다. 다산을 측근에 두려는 임금의 의중이 담긴 인선이었다.

하지만 다산은 왕명을 받고 하루 밤 숙직하고는 이튿날 곧바로 사직 상소를 올린 후 대궐을 나와 버렸다. 왜 그랬을까? 남인인 다산을 왕의 측근으로 둘 수 없다고 판단한 노론의 대간(臺諫)들이 격식에 안 맞는다며 임명 취소를 청하였기 때문이다. 정조는 다산 카드를 그대로 밀어 붙였다. 그런데 정작 다산이 상소문을 올리고 대궐을 나가 버렸다. 임금이 역정을 냈다.

사헌부의 탄핵 글이 올라온 이상, 사직소를 올리는 것은 당시의 관례였다. 하지만 임금의 뜻이 워낙 강경했다. 다산도 고집을 꺾지 않았다. 3월1일에 올린 ‘한림원을 사직하는 상소(辭翰林疏)’에 이어, 이튿날인 3월 2일에 ‘한림원을 사직하는 두 번째 상소(辭翰林再疏)’를 연이어 올렸다. 다산은 이 글에서 임금을 측근에서 모시는 예문관의 직분이 지극한 영광이지만, 사헌부가 탄핵하고, 공론의 꾸짖음이 있는 이상, 나라의 전례를 어길 수 없고, 임금에게 누를 끼칠 수 없다고 썼다.

‘다산시문집’에 실린 두 번째 상소문의 끝에 다산은 작은 글씨로 이런 주를 달았다. “갑과(甲科)는 본래 한림권점(翰林圈點)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하지만 이때 대간이 내가 갑과 출신으로 권점에 뽑혔다고 하여 격식에 어긋난다고 말했다.” 사헌부의 주장이 자신의 입사(入仕)를 막으려는 생트집임을 다산이 익히 알고 있었다는 얘기다.

 ◇명분축적용 해미 유배 

정조는 다산을 곁에 두고 싶었다. 1789년의 배다리 설치 때뿐 아니라, 자신이 구상 중이던 화성 건설에서도 그는 활용할 구석이 많은 인재였다. 다산이 계속 말을 안 듣자 정조는 이제 막 새로 벼슬길에 오른 소관(小官)이 임금의 교지를 두고 어찌 이처럼 방자하게 행동하느냐며 화를 벌컥 냈다. 3월7일에는 다산의 죄를 물어 충청도 해미(海美)로 유배를 보내라는 명이 떨어졌다.

다산은 3월10일에 도성문을 나서, 3월13일에 해미에 도착했다. 하지만 싱겁게도 열흘만인 3월 22일에 바로 해배 명령이 도착했다. 다산은 당일로 짐을 싸서 상경했다. 열흘간 유배 소동의 행간을 살펴보면 일종의 정치적 쇼라는 생각이 든다. 다산이 한사코 부임을 거부한 것이나, 정조의 분노를 실은 유배 명령이 다 그렇다. 사헌부가 반대하니 벼슬에 안 나간다. 당장 안 나오면 귀양 보내겠다. 그래도 못 나간다고 끝까지 버티면, 임금은 그 죄를 물어 귀양을 보낸다. 그런 다음 바로 불러 올려 앞서 보다 더 높은 자리에 임명한다. 귀양으로 이미 한 차례 명분이 축적된 데다, 매번 발목을 잡아챌 수 없어 이때는 큰 저항이 없다. 열흘 만에 풀린 다산의 해미 유배는 다분히 반대파의 재갈을 물리기 위한 명분 축적용이었던 셈이다.

 ◇덤불 속의 사도세자 

이때의 상경 길에서 다산의 동물적 정치 감각을 보여준 또 하나의 에피소드가 있었다. 3월23일, 다산은 상경 길에 옴을 치료하려고 온양 온천에 들렀다. 30년 전인 1760년에 사도세자가 이곳에 납신 적이 있었다.

탕인(湯人), 즉 목욕장을 관리하던 자에게 다산이 당시의 일을 물었다. 한 노인이 나서더니 말했다. “그때 동궁께서 행궁서 주무실 때 일이었습지요. 금군(禁軍)의 말이 백성의 수박밭을 마구 짓밟아 수박이 다 깨져 남아난 것이 없었습니다. 동궁 저하께서 그 일을 들으시고는 전부 값으로 쳐서 보상해주게 하시고는, 남은 수박을 금군들에게 내리셨답니다. 환성이 우레와 같았었지요.”

노인이 또 말했다. “동궁께서 온천 서편 담장 아래에 과녁을 설치하시고 활을 쏘신 뒤, 기분이 상쾌하다시며, 이곳에 단을 쌓아 홰나무 한 그루를 심게 하셨는데, 그 나무가 지금도 남아있답니다.” 다산이 그 나무를 찾아가보니, 덤불에 뒤덮인 채 옹이가 져서 키도 크지 않은 상태였다. 아무도 돌보지 않아 칡넝쿨이 가지에 얽히고, 기와 조각과 똥 덩어리 등이 지저분하게 쌓여 있었다.

다산이 분통을 터뜨렸다. “너희가 잘못했다. 어찌 동궁께서 손수 심으신 나무를 이처럼 황폐하고 지저분하게 내버려 둔단 말이냐? 단을 쌓으라는 명이 있었는데도 이럴 수 있느냐? 당장 돌을 줍고 풀을 베고 정돈해라.” 탕인(湯人)이 바로 관아로 달려가서 말했다. “정한림(丁翰林)께서 이곳에 들러 괴대(槐臺)가 잡초에 덮여 지저분하게 된 죄를 엄하게 나무라고 갔습니다.”

관에서 놀라 뒤늦게 홰나무 주변을 정돈하고 단을 쌓았다. 보고가 올라가자, 정조가 기뻐하며 그곳에 영괴대(靈槐臺)란 이름을 내리고 비석을 세웠다. 비석에는 사도세자의 은혜로운 일과 덕담을 새겨 넣었다. 사도세자는 원래 백성을 아낄 줄 알았던 임금의 재목이었다. 그런데 동궁께서 손수 심은 홰나무는 칡넝쿨에 덮이고 돌무더기 똥 덩어리 속에 파묻혔다. 이를 드러내 깨끗이 정돈하고, 그 아름다운 사적을 기리는 것은 신하로서 당연히 해야 할 도리가 아닌가?

아버지 사도세자를 그리며 정조가 새단장한 영괴대에 세운 비석, 정면 글씨는 정조의 친필이다. 문화재청 제공
아버지 사도세자를 그리며 정조가 새단장한 영괴대에 세운 비석, 정면 글씨는 정조의 친필이다. 문화재청 제공
정조의 명으로 세워진 영괴대비 후면에 새겨진 비문 탁본. 한신대박물관 제공
정조의 명으로 세워진 영괴대비 후면에 새겨진 비문 탁본. 한신대박물관 제공

미치광이로 몰려 뒤주에 갇혀 죽었던 비운의 세자가 이렇게 애민의 상징이 되어 귀환했다. 잡초 덤불과 오물에 덮여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황량한 땅에 비각이 들어서고 임금이 친히 지은 글이 돌에 새겨졌다. 아이들이 올라타고 옹이가 져서 꾀죄죄하던 나무는 나라에서 관리하는 보호수가 되었다. 국가에서는 기록화로 그려 그 현장을 기억했다. 당시 정조의 의중과 맞물려 이 일은 참으로 절묘한 상징적 장면을 연출했다.

다산은 정조의 가려운 데를 쏙쏙 긁어주었다. 시키지 않은 예쁜 짓이었다. 지금 온양관광호텔 온천장 입구에 정조가 이때 세운 비석이 서 있다. 영괴대(靈槐臺)의 자취도 보존되었다. 다산의 이 일화는 사라진 책 ‘균암만필’에 실렸던 내용으로 ‘사암연보’ 속에 발췌되어 있다.

 ◇온양 행궁의 홰나무 

다산은 생색내지 않고 시 한 수만 남겼다. 제목이 길다. ‘온양 행궁에 장헌세자께서 손수 심은 홰나무 한 그루가 있다. 당시 단을 쌓아 그늘을 드리우게 하였는데, 세월이 오래되어 나무는 옹이가 지고, 단도 보이지 않아 구슬피 짓는다(溫宮有莊獻手植槐一株 當時命築壇以俟其陰 歲久擁腫 壇亦不見 愴然有述)’이다.

온양 행궁 안쪽에 한 그루 홰나무

오랜 세월 잡초 덮여 덤불에 묻혀있네.

외넝쿨 새삼 덩굴 괴롭게 서로 얽혀

뜻과 기운 답답해라 겨우 한 길 자랐구나.

마른 가지 뻣뻣하고 둥치는 옹이 져서

그 옛날 동궁께서 손수 심음 누가 알리.

동궁께서 이곳에서 곰 과녁을 쏘실 적에

강철 살촉 다섯 발이 모두 눈알 꿰뚫었네.

이에 귀한 나무 심어 그 땅을 표시하고

섬돌 쌓아 단 만들라 명하여 두시었지.

긴 가지 푸른 구름 스침을 함께 보며

짙은 그늘 뜨락 가득 푸를 것만 같았었지.

푸른 깃발 한번 가곤 아무런 소식 없자

참새 떼 짹짹대며 밤중에 모여든다.

가지 온통 아이들이 기어오름 당하니

기왓장 자갈돌을 누가 한번 치웠던가?

구슬피 서성이며 자리 뜨지 못하다가

얽힌 것 직접 뜯어 울 너머로 내던졌네.

아! 이 나무를 그 누군들 안 아끼리

너희는 꺾거나 휘어서는 아니 되리.

내 장차 돌아가서 임금께 아뢰어서

이 나무 천년 길이 존귀하게 하고 말리.

溫泉宮裏一樹槐(온천궁리일수괴)

歲久蓁蕪沒蒿萊(세구진무몰호래)

瓜蔓兎絲苦相糾(과만토사고상규)

志氣鬱抑長丈纔(지기울억장장재)

枯條澀勒幹擁腫(고조삽륵간옹종)

誰識儲君舊手種(수지저군구수종)

鶴駕於此射熊帿(학가어차사웅후)

鐵鏃五發皆貫眸(철촉오발개관모)

爰植嘉木表其地(원식가목표기지)

且令砌石爲檀壝(차령체석위단유)

會見脩柯拂雲靑(회견수가불운청)

擬有濃陰滿庭翠(의유농음만정취)

蒼旂一去無消息(창기일거무소식)

鳥雀啾啾聚昏黑(오작추추취혼흑)

杈枒總被衆兒攀(차야총피중아반)

瓦礫何曾施一彎(와력하증시일만)

彷徨惻愴不忍去(방황측창불인거)

手決纏縛投籬間(수결전박투리간)

嗚呼此樹誰不愛(오호차수수불애)

戒爾勿剪且勿拜(계이물전차물배)

吾將歸去奏君王(오장귀거주군왕)

此樹尊貴長千載(차수존귀장천재)

다산은 한 수의 시로 덤불에 가려지고 오물에 묻혔던 사도세자의 가치를 부활시켰다. 미치광이로 몰려 뒤주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의 명예 회복이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임금의 노여움을 입고 떠난 유배지에서 다산은 열흘 만에 개선장군처럼 돌아왔다.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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