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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미의 다시 광릉 숲에서] 세상에서 가장 보배로운 씨앗(種子)

입력
2018.10.16 11:11
수정
2018.10.16 11:15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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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걀후라이 모양을 한 특산식물 노랑붓꽃 씨앗
달걀후라이 모양을 한 특산식물 노랑붓꽃 씨앗

하루가 다르게 단풍이 나무마다 깃들어가기 시작합니다. 가을이 깊어가며 자연은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과 빛깔로 모진 겨울을 준비하고 있구나 싶습니다. 단풍도 좋지만 가을의 진짜 의미는 결실에 있지 않나 싶습니다. 이 가을의 풍성한 수확을 위해 농민들이 일년 내내 땀 흘렸듯이 나무도 풀들도 열심히 지난 계절을 살았고, 그들의 삶의 방식이 다르듯 제 각각의 모습으로 씨앗을 맺어갑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은 열매입니다. 아름다운 빛깔, 먹음직스러운 과육, 달라붙기 좋은 갈고리나 끈끈이, 비행을 도와주는 솜털이나 프로펠러 같은 날개 등등 이 모든 것은 결국 열매 속 씨앗을 보다 멀리 혹은 보다 안전하게 도와주기 위한 수단이지요. 우리는 식물이 열매를 통해 보여주는 현란한 전략들에 감탄하며 막상 열매 안에 담겨있는 진짜 존재의 의미인 씨앗의 모습엔 큰 관심을 두지 않았나 싶습니다.

나비처럼 생긴 오동나무 씨앗
나비처럼 생긴 오동나무 씨앗

사실 저도 얼마 전 국립수목원에서 열린 ‘세상에서 가장 보배로운 종자’전시에 소개된 희귀, 특산식물들의 씨앗 모습을 보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그저 작은 씨앗이려니 했는데 습지에 살고 있는 낙지다리라는 식물의 씨앗은 확대해 들여다보면 도깨비방망이처럼 생겼는데 길이가 0.4mm정도 되고, 석회암지대에서 아주 드물게 발견되는 복사앵도나무의 씨앗은 그보다 30배 이상 크더라고요. 더 재미있었던 것은 씨앗은 그저 갈색이나 까만색으로 둥글거나 타원형이려니 했는데 모양이 매우 다양하여 오동나무 씨앗은 마치 나비처럼, 우리나라 특산식물이면서 노란꽃이 아름다운 노랑붓꽃의 씨앗은 달걀후라이처럼, 역시 우리나라에만 자라는 매미꽃의 씨앗은 우주의 행성을 보듯 현대적인 느낌이 물씬 나더라고요. 이 씨앗들의 표면을 다시 배율을 높여 들여다보면 볼수록 새로운 세상이 열리고 있었습니다. 씨앗은 물론, 우리가 알고 있고 보고 있는 모든 사물의 모습은 본질에서 다소 떨어져 있고, 우리가 전체를 가늠할 수 있는 제대로 된 시선을 가지려면 속단하지 말고, 넓게 혹은 깊게 보아야 한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습니다.

행성처럼 보이는 특산식물 매미꽃의 씨앗
행성처럼 보이는 특산식물 매미꽃의 씨앗

“모든 우거진 나무의 시작은 기다림을 포기하지 않은 씨앗이었다.” 나무 과학 그리고 사랑이라는 부제가 붙은 ‘랩걸’이라는, 호프 자런의 유명한 책에 나오는 가장 유명한 구절입니다. 다 살아낸 다음에 만들어낸 결실의 산물, 씨앗은 다시 새로운 시작입니다. 포기하지 않고 기다리며 극복해야 하는 일은 한 겨울의 추위뿐 아니라 수년에서 아주 드물게는 수천 년을 이어지는 온도, 습도, 빛과 같은 다양한 조건의 어려움입니다. 랩걸은 그 끝이 우거진 나무라고 했지만, 씨앗에서 생겨난 생명과 연결된 다양한 먹이사슬과 분해과정, 그리고 물리적인 환경을 바꾸어가며 이어지는 참으로 거대하고 멋지고 무한한 세상의 시작입니다.

매미꽃 씨앗의 확대된 표면
매미꽃 씨앗의 확대된 표면

그 작은 씨앗 안에는 오랜 세월 누적된 유전적인 정보들이 담겨 다양한 가능성을 가지고 세대를 이어갑니다. 그래서 절대적으로 식물들에 기대어 살아가는 사람들은 동일한 개체를 복제할 수 있는 기술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기후에, 질병에, 식량에, 치유에 도움이 되는 답을 찾을 수 있는 씨앗을 세상에서 가장 보배로운 존재라고 감히 말하는 것이겠지요.

유난히 하늘이 높고 서늘한 가을을 맞이하면서 단풍 빛에 들뜨는 대신 작은 종자에 깃든 깊은 의미와 아름다움을 만나보시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지금 국립수목원 종자전시와 수십 미터 지하터널에 영구적으로 야생종자를 저장하는 세계 최대규모의 시드볼트가 있는 경북 봉화의 국립백두대간수목원 가을 나들이가 어떨까 싶습니다.

이유미 국립수목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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