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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리ㆍ적폐 양파껍질 까듯… 곪을대로 곪은 대학 연구실

입력
2018.10.13 09:00
수정
2019.01.08 11:28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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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석 안한 기업 임원 출신에 선물 받고 졸업장 준 교수도”

전임교수, 강사에 잡일 시켜… 반발 땐 “자리 잡아야지?” 협박

“대학이 비리조직 같아… 양심 갖고 사는 게 너무 괴롭다”

잊을 만하면 불거지는 학계 비리는 해를 거듭할수록 심각해지고 교묘해진다. 연구자들은 “학문을 사랑하는 사람이 연구를 해야 하는데 돈을 따르니 문제”라며 답답한 마음을 드러냈다. 고영권 기자
잊을 만하면 불거지는 학계 비리는 해를 거듭할수록 심각해지고 교묘해진다. 연구자들은 “학문을 사랑하는 사람이 연구를 해야 하는데 돈을 따르니 문제”라며 답답한 마음을 드러냈다. 고영권 기자

“학문이 아닌 적폐부터 배우고 있으니 노벨상 수상자가 나오겠습니까.”

스웨덴 왕립과학원 노벨위원회가 이달 초 발표한 제118회 노벨생리의학상ㆍ물리학상ㆍ화학상 등 과학 분야 수상자 가운데 역시 한국인은 없었다. 국내 유수대학 및 연구기관에서 일하는 연구자들은 유독 우리 과학계에서 노벨상 수상에 다다르는 발군의 인재가 배출되지 못하는 이유로 연구실에서 벌어지는 각종 부조리와 이를 감싸 안는 사회의 불합리한 시스템을 꼽는다. 연구비 횡령 등 각종 비리, 학위 비즈니스, 그리고 필요 이상으로 관용적인 사법부의 판단. 익명을 요구한 국립대 의대 교수 A씨는 “연구비 비리를 비롯한 학계 부조리가 해를 거듭할수록 심각해지고 교묘해지는데 노벨상은커녕 제대로 된 연구를 할 수 있겠느냐”라며 “대한민국 대학에 몸담고 있으며 양심을 갖고 사는 게 너무 괴롭다”고 호소했다.

과도한 실적주의와 연구비 쏠림 현상, 생산성을 떨어뜨리는 잡무 분담, 성과에 대한 국제적 평가와 네트워크 부족…. 한국 과학의 진흥을 가로막는 건 이런 낱낱의 문제만은 아니다. 학문의 계승자를 비서나 연구부품 정도로 여기는 학계 풍토부터가 잘못됐다. 교수 지위를 이용해 사욕을 채우는 관행은 연구자들의 사기와 학술 경쟁력을 떨어뜨린다.

본보가 학계에 만연한 연구비 불법 공동운영 실태를 보도한 이후(9월 17일자) 국내 이공계 대학의 연구 텃밭을 망치는 사례 제보가 이어졌다. 구체적인 증거자료까지 모아두고 때를 기다린 교수와 학생도 적지 않았다. 문제의식은 진작에 품고 있었지만 자신의 소속과 그동안의 성과를 부정하면서까지 차마 고발할 수 없었다고 한다.

◇“학교가 아니라 비리조직에서 일한다”

지방 모 국립대학 이공계 학과에서 20여년 간 재직한 안광현(가명) 교수는 오랜 기간 대학의 부조리를 목격했지만 묵과했다고 털어놨다. “후속 세대의 미래를 저당잡아 자기 욕심을 채우는 학계 적폐들이 교단에 서고 있습니다. 출석조차 하지 않은 학생에게 학점을 주고 졸업장을 주는 학위장사는 예사이고 학과 엠티 명목으로 골프 접대를 받는 일도 직접 목격했습니다.”

안 교수에 따르면, 문제의 선배 교수 B씨는 뒤늦게 4년제 졸업장을 얻기 위해 대학에 입학한 기업 임원 출신 50대 학생들로부터 명절 선물로 고급 양주와 50만원 상당 상품권을 받아왔다. 기업을 이끄느라 수업에 참석할 수 없다는 애로사항도 미리 전달받았다. B교수의 언질로 학기가 끝날 무렵 문제없이 졸업장을 받을 것이라 믿었던 늦깎이 학생들은 “왜 F학점을 주느냐”며 안 교수를 찾아와 따졌다. 안 교수는 수업에 나오지 않았으니 당연한 결과라고 잘라 말했다. “수업에 나오지 않은 학생들이 뻔뻔하게 묻더군요. 다른 교수들은 별말 없이 양주와 상품권을 받았는데 왜 유독 저만 돌려보냈냐고요. 그때 생각했습니다. ‘내가 학교에 있는 게 아니라 비리조직에 있구나’ 라고요. 학생 지도와 교육에는 관심이 없고 비리를 일삼으며 사리사욕을 채우는 교수들과 더 이상 같이 지내선 안 되겠다는 생각에 증거를 모아 문제제기했지만 교수들 사이 ‘눈엣가시’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제 B교수는 정년을 몇 개월 앞두고 있다. 그가 재직한 20여년간 비싼 등록금을 내고 B교수에게 학문 대신 불법과 반칙을 배웠을 졸업생이 얼마나 될지 헤아리기 어렵다.

안 교수는 정도(正道)를 지키면 오히려 ‘왕따’가 되는 학계가 비정상이라고 역설했다. “이런 비리에 타협하지 않는 교수들이 더 많습니다. 소수의 비리 교수들이 처벌받아 교단을 떠나거나 정년 퇴임하지 않는 이상 정도를 걷는 교수들은 압박을 이겨내느라 더 많은 에너지를 쏟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학생들이 사회에 진출하기도 전에 온갖 어두운 면을 경험하게 되니 참담한 심정입니다.”

불법에 찌든 대학 연구실. 삽화=김경진 기자
불법에 찌든 대학 연구실. 삽화=김경진 기자

◇‘교수 갑질’에 우는 조교수ㆍ시간강사들

교수의 갑질은 학생들에게만 향하는 게 아니다. 조교수나 비정년 교수들도 기득권 교수들의 권력 앞에 속절없이 ‘노예’가 된다. 갑질에 시달리고, 이에 대응하느라 성과를 기대할 만한 연구에 쏟을 열정은 이내 바닥이 나버린다.

모 사립대에서 조교수로 일하는 최혜진(가명)씨는 “교수 갑질에 시달린 대학원생들의 하소연이 남 일 같지 않다”라며 말문을 열었다. “시간강사 시절 방학 때 겪은 일입니다. 어느 전임교수가 학회 자료를 준비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손이 많이 가는 잡일이었죠. 새 학기가 시작되고 준비한 자료는 그 교수의 대학원 강의자료라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제게 동의를 구하거나 대가도 주지 않고 조교 업무를 시켰느냐’고 반발하자 그 교수는 ‘최 선생, 자리 잡아야지? 다른 학교 임용심사에 내가 심사위원으로 들어가는 거 몰라?’라고 오히려 협박을 하더군요.”

최씨는 강사 시절이던 수년 전 서울 모 사립대 전임교수 아들의 추천서를 허위 작성하도록 강요받았다. 전임교수 C씨는 최씨를 비롯한 강사와 비정년 교수들을 상대로 추천서를 요구했다고 한다. C씨는 다른 교수들과 공동 집필한 논문에 고등학생 아들의 이름을 제1 저자로 올리기도 했다. 최씨는 “전임교수들의 횡포가 비정규직 교수들의 정신을 피폐하게 한다”며 학생과 교수 등 대상을 가리지 않는 교수들의 갑질에 혀를 내둘렀다. 학생들은 그나마 졸업이나 취업과 함께 교수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지만 전임교수와 계속 일해야 하는 비정규직 강사나 조교수는 목표를 이루기까지 부당함을 견뎌야 하는 것이다.

학계 문화가 조금씩 바뀌며 연구자들은 적극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신고와 고발도 각오한다. 그러나 학계 정의실현의 발목을 잡는 건 따로 있다. 문제점이 드러나면 관련 영역의 모든 연구가 마비되는 시스템이다. 박사과정 휴학 중인 이화평(가명)씨는 벼룩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우는 해결방식이 문제를 쉬쉬하게 만든다고 토로했다. “바로 잡을 건 바로 잡고 가야 후배들이 더 나은 환경에서 연구한다는 생각은 대다수가 합니다. 연구조치가 올스톱 되는 해결 방식만 아니라면 행동에 옮길 수 있겠죠. 연구종료가 코앞인데 비리가 드러나면, 해당 프로젝트가 기약 없이 연기되고 그에 따라 졸업이나 취업까지 미뤄지는 결과가 발생할 게 뻔하니 입을 닫게 됩니다.”

한국연구재단 연구비 관련 고발 현황. 그래픽=강준구 기자
한국연구재단 연구비 관련 고발 현황. 그래픽=강준구 기자

◇ “악질 교수에 관용 베푸는 판결 문제”

국가연구개발사업은 국가 예산 약 20조원이 투입되는 거대 규모 사업이다. 교육부나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사업을 총괄하고 한국연구재단이 용역을 발주하고 예산을 편성ㆍ심의하는 등 실무를 담당한다. 미래 먹거리나 기초연구를 위해 편성된 예산은 연구 실무자들의 인건비이자 생계유지 수단으로 사실상 임금에 해당한다. 그러나 근로자성이 부정되는 문화와 연구비 공동관리(poolingㆍ풀링) 등 여러 관행이 인건비의 정당한 집행을 가로막기 일쑤다. 학생연구자들은 근로자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까닭에 법적 보호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어서다.

한국연구재단은 감사를 통해 다른 목적에 쓰인 돈을 회수(연구비 환수조치)하고 해당 연구자가 재단의 연구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한다(연구참여 제한조치). 2016년부터는 연구비 관련 범행이 드러나면 적극적으로 고발하고 있다. 한국연구재단에 따르면 재단 감사 결과 연구비를 개인적인 목적으로 사용해 수사기관에 고발 조치한 교수는 최근 3년간 22명에 달한다. 2016년 5명, 지난해 7명, 올해 10월 1일 기준 10명이다. 재단 관계자는 “관행을 그대로 방치하면 국내 연구가 발전할 수 없다는 인식 아래 일벌백계 차원에서 연구비 환수 조치 등 행정처분과 함께 수사기관에 고발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문제는 이런 제재조치가 오랜 기간에 걸쳐 이뤄져 해당 연구실의 연구는 사실상 중지돼 큰 피해를 입는 반면, 정작 교수들은 처분을 피할 가능성이 커진다는 점이다. 연구재단이 연구비 횡령 등의 문제를 발견해 부처에 보고하면, 부처는 여러 단계의 검토를 거쳐 최종 처분을 내린다. 이때 해당 교수가 제재처분에 대한 집행정지를 구하는 가처분 신청을 하면 상황이 달라진다. 법원이 교수의 신청을 받아들여 처분을 정지하면, 이 집행은 판결 이후로 미뤄지면서 제재조치가 임시로 풀리는 결과가 발생한다.

학생연구자 인건비 지급을 위한 필요악일까. 온당한 연구비 이상의 돈을 챙기는 횡령의 발단일까. 연구만으로도 하루가 부족한 대학원생들은 자신들이 불법과 다름없는 관행을 저지르고 있다는 불편함을 떨쳐버리기 힘들다고 토로했다. (사진 속 인물은 기사 내용과 무관함) 고영권 기자
학생연구자 인건비 지급을 위한 필요악일까. 온당한 연구비 이상의 돈을 챙기는 횡령의 발단일까. 연구만으로도 하루가 부족한 대학원생들은 자신들이 불법과 다름없는 관행을 저지르고 있다는 불편함을 떨쳐버리기 힘들다고 토로했다. (사진 속 인물은 기사 내용과 무관함) 고영권 기자

실제 서울 시내 모 대학교 공대에서 대학원생들에게 지급된 인건비 4억3,000여만원 중 1억5,800만원을 공동관리하다 적발된 윤모 교수는 “제한조치를 취소해달라”고 행정소송을 내 승소했다. 한국연구재단이 부과한 연구비 환수조치와 국가연구개발사업에 5년간 참여제한 조치 처분은 법원의 판단으로 무력화된 셈이다. 서울행정법원은 판결문에서 “(연구비 공동관리를 금지하는 목적은) 연구원에게 지급돼야 하는 인건비를 본래 용도로 사용하지 않게 되어 연구원의 최소한의 경제적 기반을 무너뜨리고 연구의욕을 저하하는 것을 방지하는 데 있다“면서 “(윤 교수가) 개인적인 이익을 취한 것은 없어 보이고(중략) 결과적으로 연구 인원에게 모두 지급되었음에도 참여 제한 처분을 하였는 바 향후 교수로서 연구활동을 함에 있어 중대한 지장을 초래하는 것으로서 재량권을 일탈 남용하여 위법하다”고 판단했다.

이에 대해 연구비 공동관리와 관련한 소송을 다룬 경험이 있는 실무자는 “연구비와 관련한 법원의 판결 경향이 대학원생들의 눈물을 외면하는 측면이 있다”며 “(법원의) 현실인식과 관점의 차이가 크다고 느낀다”고 털어놨다.

“법원이 연구사회의 풍토를 갈아엎어야 하는 현실적 긴요함을 어째서 외면하는지 씁쓸합니다. 연구사회의 적폐인 교수 갑질, 그리고 연구비 공동관리 관행에 대해 법이 규정한 가장 강력한 제재를 내려도, 정작 실태를 알 수 없는 사법부가 처분취소판결을 내리면 솜방망이 제재를 받거나 무력화되는 결과가 됩니다. 게다가 행정소송에서 교수가 승소해 참여제한 처분이 취소되면, 다시 제재조치를 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매우 복잡해집니다.”

이에 서울행정법원 관계자는 “행정소송에서는 당사자에게 회복할 수 없는 손해가 발생할 염려가 있을 때 집행을 정지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며 “요건을 충족해서 집행정지 신청을 받아들인 것이기 때문에 (행정청이 패소한 결과가 나오더라도) 문제되는 것은 아니다”고 설명했다.

국가연구사업 연구비 흐름도=강준구 기자
국가연구사업 연구비 흐름도=강준구 기자

◇교수들 ‘이직 러시’…연구 환경 휘청

최상급 연구대학으로 손꼽히는 한 대학에서는 최근 5~6년새 교수 10여명이 줄줄이 이직하며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다. 인재를 귀하게 여기지 않는 풍토와 효율적인 연구를 가로막는 관료화가 교수들의 이직을 부추기는 것으로 전해진다. 국내 연구원에 근무 중인 이재헌(가명)씨는 “개교 즈음 부임해 정년을 앞둔 기득권 교수들이 학과 내에서 세력을 형성하고 있으며, 학과 운영과 교원 인사를 좌우하면서 신진교수나 외부 영입 교수들을 견제하고 있다”고 고발했다. 그는 “타성에 젖은 기존 교수들은 미미한 연구성과만 내놓으면서 신진 교수들의 발전은 방해하는 게 이직 사유 중 하나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박지연 기자 jyp@hankookilbo.com

박수현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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