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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의 시 한 송이] 가을

입력
2018.09.20 18:24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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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밤에는 창문을 살짝 열어두어도 좋지요. 차곰차곰한 온도를 느끼며 작은 스탠드 불빛 아래에서 책을 읽기도 좋지요. 문장을 따라가다 어둠을 까슬한 이불처럼 덮어보는 것도 좋지요. 문득 창 쪽으로 턱을 괴다가 당신에게로 두둥실 떠가는 나를 보게 되도 좋지요. 하늘은 높고 바람은 선선하고 열매는 사람들의 식탁에 다다른, 여백이 충분해진 시간이니까요.

어둠 속 둥근 달. 달이 켜든 랜턴, 달빛. 내가 켜든 랜턴, 당신이라는 생각. 켜겠다고 의도한 것이 아니라 저절로 그렇게 된 것. 되고야 만 것. 하늘 속 어둠이 그러하듯, 어둠 속 달이 그러하듯, 달의 달빛이 그러하듯, 당신이라는 생각은 저절로 켜졌지요. 저절로 길이 되어 뻗어나갔지요.

당신을 켜놓은 채 잠이 들게 된 것은, 내가 나를 떠나 멀리 가는 여행을 시작했다는 뜻이지요. 당신에게로 뻗어간다는 것은, 나는 잠들고 당신은 점점 더 환해지는, 잠든 나는 잠든 채 당신을 알아보게 되는 동화지요. 한 철학자의 문장처럼 생각할 수 없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것은, 말할 수도 없지요. 저절로 켜지는 당신은 나의 생각이며 상상이지요.

딱 한 줄. 나머지는 모두 여백. 가을의 모습이지요. 꼭 가을인 시 앞에서 말이 길어졌네요. 당신 생각을 켜놓은 채 잠이 들었습니다. 동화의 맨 처음이라면? 앙징맞은 지우개가 달린 부드러운 연필로 이후를 적어보기로 해요.

이원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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