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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 칼럼] 인간은 진정 뛰어난 것을 원하나?

입력
2018.09.19 11:08
수정
2018.09.19 17:27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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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절 캐머런의 ‘로봇과 일자리: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이음, 2018)는 인공지능 로봇이 10~20년 안에 미국 노동력의 절반까지 대체할 수 있다고 말한다. 미국 전체 고용의 약 47%가 인공지능 로봇에 일자리를 빼앗길 수 있는 고위험 군에 속하며 19%가 중간 정도의 위험군에 속한다. 이는 미국 고용인구의 절반 이상이 머지않아 실직자가 된다는 뜻이다. 인공지능의 눈부신 발전은 기술이 낮은 직업만 아니라 변호사ㆍ의사ㆍ교사ㆍ연예인 등 인공지능화하기 어려운 영역이 사라질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지은이는 인공지능으로 대체 불가능한 인간 지수(human quotient) 높은 직종을 찾으라면서 예술과 창작 분야를 답안으로 제시한다.

지은이의 사고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창작이란 무(無)에서 유(有) 만드는 것이며 인간으로부터 지능을 부여받은 인공지능에는 그런 능력이 없다는 편견이다. 그러나 원래 창작은 유에서 유를 만드는 것이다. 조금 안다는 학자들도 한편에 도덕적ㆍ법적 지탄을 받는 사악한 표절이 있고, 그 반대편에 가치중립적인 참고ㆍ인용ㆍ차용ㆍ패러디ㆍ패스티시ㆍ번안ㆍ다시쓰기가 있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뒤에 열거한 것들이야말로 표절을 할 때 쓰는 기술(skill), 다시 말해 유에서 유를 만드는 기술이다.

표절의 기술 가운데 ‘영향’은 도덕적ㆍ법적 추궁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만, 이것만큼 교묘한 표절도 없다. 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의 경우, 4대 복음서와 찰리 채플린이 없었다면 아예 창작될 수 없었다. 이제까지의 논리를 압축하면 다음과 같다. ①영향을 포함해, 참고ㆍ인용ㆍ차용ㆍ패러디ㆍ패스티시ㆍ번안ㆍ다시쓰기는 표절의 기술이다. ②표절이 도덕적ㆍ법적 추궁을 받아야 하는 예외도 분명 있지만, 표절은 애초부터 배척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③‘표절=창작(창작=표절)’이다. 위대한 표절(창작)을 하기 위해서는 다독이 필수적인데, 이 게임에서는 인공지능이 인간보다 훨씬 유리하다. 미국의 로펌이 재판 준비를 위해 수천 건의 사건 서류와 판례를 검토할 때 이용하는 컴퓨터는 57만건의 서류를 이틀 안에 분석하고 분류한다. 하지만 이것들은 이번 칼럼의 주제가 아니다.

인공지능이 아무리 발전해도 인간과 같은 뛰어난 작품을 쓸 리 만무하다는 작가와 독자 제현이 있다. 이들에게는 대중도 시장도 뛰어난 것을 원치 않는다는 사실을 상기시키자. ‘홀로서기’ ’아버지’ ’봉순이 언니’ ’엄마를 부탁해’ 같은 시집과 소설은 베스트셀러를 쓰는 일에는 뛰어난 지능이 오히려 거추장스럽다고 가르쳐 준다. 역설적으로 말해, 이런 작품은 인공지능으로도 충분하다. 베스트셀러는 반문한다. ‘독자는 과연 뛰어난 것을 원하는가?’ 인간의 지능 이상으로 발전한 인공지능 로봇이 최인훈이나 박상륭의 난이도를 훨씬 상회하는 수작을 쏟아 낸다면 우리는 그것을 읽을까. 독자는 평범하고 조악한 것에 열광한다.

이제 질문을 넓히자. ‘인간은 진정 뛰어난 것을 원하는가?’ 지난 8월 14일, 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1심 무죄 선고를 받자 ‘재판부를 인공지능 로봇으로 대체하라!’는 구호가 들렸다. 그러나 인공지능이 어떻게 진화되어 가든, 인공지능은 인간의 정의나 윤리를 진작시키거나 수호하지 못할 것이다. 인간은 인공지능이 돈과 건강(장수)과 쾌락을 가져다 주는 도구에 머무는 것으로 만족할 것이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ㆍ공자ㆍ예수 같은 성현들은 인간의 욕구나 욕망보다 뛰어난 것을 추구했기에 모욕받거나 처형당했다. 일찍이 도스토예프스키는 예수가 재림해 봤자 부패한 사제들에게 다시 십자형을 받게 될 것이라는 우울한 우화를 지은 바 있지만, 인공지능을 몰랐던 그는 예수가 인공지능 로봇으로 재림할 수도 있다는 상상만은 미처 하지 못했다. 예수가 그랬듯이 인간 종(種)보다 더 나은 정의와 윤리를 추구하는 인공지능이 있다면 그의 운명은 뻔하다. 인간은 인간의 욕구와 욕망을 바로잡아 줄 인공지능은 절대 바라지 않을 것이다. 산업 로봇은 물론이고 군사 로봇과 섹스 로봇에 쏟는 막대한 연구와 투자는 인간이 진정 뛰어난 것을 원하기는 하느냐고 묻는 듯하다.

장정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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