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알림

[이정모 칼럼] 테라로사 돌리네 그리고 싱크홀

입력
2018.09.04 10:36
0 0

사람이 흙을 밟지 않고 살 수 있을까? 있다! 현대 도시인들은 흙을 한 번도 밟지 못하는 날이 더 많다. 도로에는 아스팔트가 깔려 있고 인도는 블록으로 덮여 있다. 심지어 학교 운동장조차 인조잔디와 우레탄 트랙이 덮고 있다. 신발에 흙을 묻히고 다니는 개구쟁이들을 본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다.

농사 짓기 가장 좋은 흙은 검은색이다. 유기물이 많다는 증거다. 검은색 흙은 비옥하다. 물론 예외는 있다. 제주도의 검은 흙에도 유기물이 많지만 화산회토와 결합하면서 유기물 자체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 우리나라 농토에는 검은 흙보다는 붉은 흙이 많다. 아예 단양(丹陽)이라는 도시가 있을 정도다. 붉은색을 띤다는 것은 철분이 많다는 뜻이다. 철분이 많다고 흙이 모두 붉은색이 되는 것은 아니다. 붉은색 흙도 배수가 잘 되지 않으면 회색-녹색-청색으로 변한다. 논의 흙은 대부분 회색이다. 배수가 잘되지 않기 때문이다. 당연하다. 논이 배수가 잘되면 논으로 쓸 수가 없다.

강릉으로 여행 가면 으레 테라로사에 들르게 된다. 여기서 말하는 테라로사는 커피공장과 카페를 말한다. 커피가 맛있다. 테라로사 커피공장이 유명하다 보니 테라로사를 무슨 커피 종류로 아는 사람도 있다. 테라로사는 이탈리아어다. 석회암이 풍화되면서 생긴 붉은(rossa) 흙(terra)이라는 뜻이다. 우리나라 국토의 상당 부분이 고생대 때는 바다 밑이었다. 그래서 탄산칼슘 성분이 풍부한 석회암이 많다. 석회암의 칼슘 성분이 물에 녹아 나오고 철과 알루미늄이 흙 안에 남으면서 생긴 붉은 점토 지대를 테라로사라고 한다. 테라로사는 놀라울 정도로 배수가 잘된다. 이런 데서는 논농사를 지을 수 없다. 대신 포도와 커피 농사가 잘된다. 와인과 커피 산지로 유명한 곳 주변에는 석회동굴이 많고 시멘트 공장이나 대리석 산지가 있기 마련이다.

우리나라의 문경, 제천, 영월, 평창, 정선, 삼척, 명주, 강릉으로 이어지는 지역에는 5억 7,000만 년 전~4억 4,000만 년 전 사이에 형성된 고생대 캄브리아기와 오르도비스기의 석회암 지층이 대규모로 분포한다. 단양의 고수굴, 영월의 고씨굴, 울진의 성류굴이 모두 석회암 동굴이다.

강릉에 테라로사라는 카페가 있다면 영월에는 돌리네(Doline) 또는 우발레(Uvale)라는 카페가 있음직하다. (하지만 없다.) 석회암 지대에 물이 스며들기 위해서는 절리면이 있어야 한다. 절리의 교차점처럼 물이 침투하기 좋은 곳이 침식되어 움푹 패여 웅덩이가 된 땅을 돌리네라고 한다. 쉽게 말하면 함몰 구멍이다. 그리고 돌리네와 돌리네가 이어져서 생긴 좁고 긴 땅을 우발레라고 한다. 영월의 한반도면 신천리에는 시멘트 공장 너머에 돌리네가 있다.

돌리네, 우발레, 테라로사라는 말에서 우리는 어떤 공포를 느끼기는커녕 왠지 전원풍경을 떠올린다. 그런데 이 지형들은 언젠가 한 번은 갑자기 땅이 꺼지면서 형성되었다. 그때 위에 살던 동물들은 깊은 웅덩이에 빠져 숨졌든지 아니면 혼비백산 했을 것이다. 돌리네를 영어로는 싱크홀(sinkhole)이라고 하고 우리말로는 ‘땅꺼짐’이라고 한다. 그렇다. 사람이 살지 않을 때 생긴 땅꺼짐은 돌리네이고 우리가 살고 있는데 생긴 땅꺼짐은 싱크홀이다.

싱크홀이 꼭 석회암 지대에서만 생기는 것은 아니다. 퇴적지층에서도 빈발하고 있다. 멕시코에서는 지름 50m에 깊이 376m에 이르는 세계 최대의 수직 싱크홀이 있고 베네수엘라에는 해발 2,000m가 넘는 산악지역에 깊이 350m짜리 싱크홀이 발생했다. 과테말라에서는 폭우가 화산재 퇴적층으로 스며들어 지층이 급격히 내려앉으면서 도심지에서 건물을 통째로 집어삼키는 대형 싱크홀이 발생했다.

도심지에서 싱크홀이 발생한다고 해서 무작정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우리나라에서는 대부분 굴착공사를 할 때 지반이 침하하든지 상하수관에서 물이 새어나오면서 모래와 자갈이 내려앉아서 생기는 사고다. 즉 자연 현상이 아니라 인간의 실수로 일어나는 사건이라는 뜻이다. 인간의 잘못으로 생기는 일이라면 우리만 잘하면 된다. 지반과 지하수 특성을 고려해서 공사를 하면 된다.

지난 8월 31일 서울의 한 아파트 공사장과 도로에 대형 땅꺼짐 현상이 발생했다. 가로 30m, 세로 10m, 깊이 6m의 싱크홀이 생기면서 인근 아파트 주민들이 대피했다. 전문가들은 땅꺼짐 현상이 아니라 흙막 붕괴에 따른 단순한 토사 유출이라고 진단했지만 주민들은 안심하지 못하고 있다. 피해 주민들에 대한 연대 의식이 필요하다. 도시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당할 수 있는 일이다. 피해를 입은 주민들에게 우리의 세금을 쓰는 데 아까워하지 말자.

테라로사와 돌리네는 석회암 지대에 빗물이 스며들어가 생긴 지형이다. 하지만 평소에 비를 맞아가며 단단하게 다져진 퇴적 지층에 세워진 우리 도시에서는 땅꺼짐이 발생할 이유가 없다. 우리 도시의 흙에게 비를 허락하자. 개구쟁이들에게 맨땅을 밟을 기회를 주자. 흙을 밟을 수 있는 도시가 안전하다.

이정모 서울시립과학관장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