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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준호의 역사구락부] 세종 대(代)에 확인된 한일 격차와 그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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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준호의 역사구락부] 세종 대(代)에 확인된 한일 격차와 그 후

입력
2018.05.03 10:13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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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500년의 기틀은 3대 태종과 4대 세종이 다스린 15세기 전반 50년에 다져진다. 이 무렵 영토가 팔도로 획정되고 수도가 한양으로 옮겨지며, 중앙과 지방의 직제, 토지와 조세 제도 등의 법제가 정비된다. 주목할 점은 600년만의 한일 국교 정상화로 신분제도와 화폐경제 등의 분야에서 한일 격차가 확인되는데, 이를 해소하여 조선의 발전을 300년 가깝게 앞당길 수 있는 기회를 놓친다는 사실이다.

노비제부터 보자. 1432년 3월 고려 이래의 천자수모법(賤者隨母法)이 다시 채택되어 부모 중 한 쪽이 노비인 자식이 노비가 되면서 노비인구가 빠르게 는다. 세종은 내심 태종이 황희의 계언을 듣고 1414년 6월 시행한 종부법(從父法)을 지키려 한다. 하지만 1424년 8월의 허조 계언 후 신하들의 간청이 지속되자 끝내 개악에 동의한다.

서얼차대제는 1415년 제정된 서얼금고법에 근거하며 세종대에 강화된다. 이복 형제와 정적에 대한 태종의 적개심이 적자와 양인 첩 소생인 서자, 천인 첩 소생인 얼자를 차별토록 한 것이다.

두 신분제는 단기적으로 양반 등 지배층의 이익을 지켜주지만, 장기적으로 인재 풀과 납세 인구를 줄여 국력을 약화시키고 불만과 불평을 품은 민중을 늘려 사회 안정을 위협한다. 중ㆍ일에도 노비가 있지만 수가 적고 세습되지 않으며, 지배층내 서얼차별은 정도가 훨씬 약하다. 이후 노비제는 1731년 종모법(從母法), 1801년 공노비 해방, 1864년 궁노비 해방, 1888년 세습제 폐지, 1894년 사노비 폐지로 이어진다. 서얼차대제는 정조와 대원군대에 약화되고 1894년 갑오개혁으로 폐지된다.

한글 창제의 주역이라는 위광 때문인지 세종의 허물에 대한 언급은 별로 없다. 그런데 근자에 그의 애민정신을 반문하면서 “중ㆍ일보다 높은 노비인구 비율을 더 키웠는데 애민이 맞냐”고 지적한다. 관련하여 ‘큰 위인 세종’의 역사적 평가와 교육에서 그간의 작위적인 초인화 내지 성인화 접근보다 ‘인간적으로 고뇌하고 약간의 허물도 있는’ 친근한 지도자로 그리는 것이 더 나을지 모른다. 덩샤오핑이 ‘공(功)7 과(過)3’으로 평가한 마오쩌둥이 여전히 가장 존경 받는 인물이듯 말이다.

다음은 화폐경제 도입 포기다. 세종은 1429년 12월 1년여 만에 돌아온 통신사 정사 박서생의 보고와 건의를 통해, 일본의 앞선 화폐경제와 시장질서, 생활모습 등을 알게 된다. 하지만 일본 사례를 토대로 제시된 각종 건의는 수차의 시험적 보급을 빼고 모두 기각된다. 이로써 조선은 중국 못지 않거나 그 이상 발달한 일본의 경제를 따라잡고 추월할 수 있는 기회를 잃는다. 이후 일본과의 경제력과 군사력 차이가 확대됨은 말할 것도 없다.

화폐 사용의 건의 배경에는 세종이 1423년 조선통보를 발행하여 화폐경제 도입에 나선 사실이 있다. 박서생은 사용처로 숙식대ㆍ통행료ㆍ어량세ㆍ소금대ㆍ선세ㆍ노비 공물 등을 거론한다. 물론 그는 구리 부족과 낮은 주조 기술, 동전 가치 하락으로 1426년 쌀, 면포 등 물품화폐와 칭량 금ㆍ은화 체제로 되돌아간 사실을 알고 있었다. 재시행 건의가 공염불이 되면서 당대의 글로벌 인재인 박서생의 추가적 활약도 볼 수 없게 된다.

그리고 화폐경제로의 이행은 17세기 중후반 효종대 김육과 숙종대 허적의 활약까지 미뤄진다.

통신사 파견의 계기가 된 국교 정상화는 일본측의 선수로 이뤄진다. 명과 조공관계를 튼 무로마치 막부 3대 장군 아시카가 요시미쓰가 1404년 태종에게 일본국왕사를 보내, 799년 일본측의 신라사 파견 중단 후 단절된 공식 외교 관계를 회복시킨다. 세종은 재위 중 3회 통신사를 보내는데 1차가 1428년 11월, 2차가 1439년 정사 고득종, 3차가 1443년 정사 변효문이다. 태종대인 1413년 정사 박분은 이동 중 와병 등으로 중지된다.

논의를 정리해보자. 조선의 노비제와 서얼차대제는 인권침해ㆍ사회안정ㆍ기회균등, 화폐경제 포기는 생활편익ㆍ경제발전이라는 오늘의 가치 기준에 비추어 보면 실책이다. 물론 옛일을 오늘의 잣대로 판단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과거는 일들을 달리 처리하는 딴 나라’라는 영국 작가 하틀리(L.P.Hartley)의 지적도 있다. 하지만 차별적 신분제와 화폐경제 포기는 당시의 중ㆍ일과의 비교를 통해서도 낙후가 확인된다. 이때 해소하지 못한 한일 격차는 증폭되어 훗날 임진전쟁과 국권피탈이라는 실격의 역사로 이어진다.

끝으로 ‘하늘이 내린 같은 백성’에게 고삐를 채우고 굴레를 씌워 차별하고 착취하여 역사의 품격을 낮추는 제도와 관행은 과거에만 있는 게 아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대기업과 중소기업 근로자의 차별은 현대판 서얼차대제로, 일본보다 정도가 심하다. 비정규직ㆍ중소기업ㆍ외국인 근로자의 희생 위에 정규직ㆍ대기업 근로자와 공무원이 우대받고 있다. 포용성이 약했던 조선의 쇠망사를 잘 알고 있는 우리다. 포용성을 키워 차별과 착취의 악행을 단절하려면 누구부터 달라지고 무엇부터 고쳐야 할까.

배준호 전 한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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