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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준호의 역사구락부] 조선의학이 동의보감에 머문 배경과 그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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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준호의 역사구락부] 조선의학이 동의보감에 머문 배경과 그 후

입력
2018.04.12 17:27
수정
2018.07.03 12:40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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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는 말기의 식민지 전락으로 이미지를 구기지만 많은 문화유산을 남긴다. 광해군대인 1613년 출간된 동의보감도 그 중 하나다. ‘질병 예방과 사람 치료’를 지향하는 조선 의학의 고전으로, 지금도 미국 듀크대병원 등 의료 일선에서 활용되고 있다. 2009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고 2015년 국보로 승급된다.

1724년 도쿠가와 요시무네 장군 명에 의한 일본판, 1747년과 1763년 청의 왕륜 초본과 좌한문 간본이 나올 정도로 유명한 의서다. 그런데 출간 후 300년 더 존속한 조선왕조에서 동의보감을 능가하는 의서가 나오지 않았다. 그 배경에는 유학의 교조적 세계관에 갇힌 조선후기 지배층이 의학, 천문학을 위시한 서양 학문과 문물 습득에 대해 보여준 거부 반응 등이 있다. 이후 조선 의학은 후학 양성이 금지된 일제 강점기의 의생(醫生), 의료기기 일부 사용이 허용되는 한의사에 의해 한의학으로 맥을 잇고 있다.

동의보감 편찬 배경에는 중국에서 도입한 이고ㆍ주진형 의학이 풍토에 맞지 않고 전란으로 중국산 약 조달이 어려워진 점이 있다. 휴전 중인 1596년 선조의 명으로 허준, 양예수 등이 자료수집과 향약 개발에 나선다. 정유전쟁과 선조 승하로 늦어지다 1609년 허준이 귀양에서 풀려날 무렵을 전후로 급진전되어 1610년 완성된다. 병명 밑에 기본이론에서 처방 등 임상의 실증적 내용까지 일관되게 서술하고 있다.

일본 의학도 1774년 ‘해체신서(解體新書)’ 발간 전엔 조선과 차이가 없다. 막부가 1720년 금서 완화 조치를 펴자 독일 쿨무스의 ‘해부도표(Anatomischen Tabellen, 1722년)’ 네덜란드어판이 수입된다. 책을 접한 의사 스기타 겐파쿠와 마에노 료타쿠 등은 1771년 3월 4일 에도 고즈캇바라에서 교수형에 처해진 교토 출신 여성의 해부에 입회한다. 이때 책 삽화의 정확성에 놀라 3년 이상 걸리는 번역에 착수한다.

해체신서 이전부터 오장육부설에 대한 회의가 있었다. 의학자 야마와키 도요가 수달의 해부와 1754년 참수형자에 대한 공식 해부 및 관찰을 토대로 1759년 ‘장지(藏志)’를 펴낸 것이다. 해체신서 간행 후 해부학에 기반한 일본의 실증 의학은 기존 개념 의학을 넘어선다.

주목할 다른 사건은 전신마취 유방암 수술의 성공이다. 1804년 10월 하나오카 세이슈는 도전 끝에 내복약 통선산(通仙散)을 개발하여 60세 환자에게 실험한다. 이 수술은, 치과의사 모톤(W.Morton)이 1846년 9월 미 매사추세츠 병원에서 다이에틸에테르 흡입을 통한 전신마취로 음악교사 프로스트의 발치에 성공한 것보다 42년 빠르다. 하나오카는 생전 150건 이상의 유방암 수술을 하는데, 마취약 개발과정에서 어머니의 목숨과 아내의 두 눈을 희생물로 바쳐야 했다.

일본내 의학의 진보와 달리 조선 의학이 동의보감의 벽을 넘지 못하면서, 양국 간 의학의 차이가 다른 과학기술 분야로 확산된다. 의서 번역과 마취 수술 도전 과정에서 다양한 정보가 축적되고, 교육을 통해 신 지식과 기술을 습득한 인력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동의보감 발간을 잉태한 임진전쟁이 끝나고 일본, 중국에선 기존 지배질서 및 룰과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군사력보다 다양한 학문 발전과 풍부한 산물, 문화가 있는 삶을 강조하는 새로운 가치관의 세계다. 이후 융성한 도쿠가와 막부와 청은 근대 진입기에 대내외 변화에 수동적으로 대응하다 쇠망한다. 하지만 다수의 사가는 이들을 평화기조와 문화창달로 자국 근세 역사의 품격을 높여준 정권과 왕조로 평가한다.

한편 후기 조선에선 기존 지배질서와 룰이 더 강화된 세계가 전개된다. 지적 호기심과 포용성이 약한 구태 정치가 재현되고, 기득권층 이익 확보가 우선시되며 백성의 눈높이에 맞춘 법제와 체제 정비가 미뤄진다. 이는 대륙의 정치지형 변화를 예감하고 신정치를 펼치려 한 광해군의 제거와 인조 옹립, 서구 질서와 룰, 학문지식을 배울 호기였던 17세기 초중반 네덜란드인 표류 당시의 벨테브레이(박연)와 하멜 일행에 대한 낮은 관심, 또 당대의 글로벌 인재격인 소현세자 암살에서 유추해 볼 수 있다.

집권자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조선은 도쿠가와 막부나 청보다 서양 서적과 정보에대한 접근을 강하게 경계한다. 이러한 시대와 제도의 벽에 일본에 대한 약한 지적 호기심이 더해지면서, 조선 의관은 서양 의서는 물론 해체신서도 접하지 못한다. 역관조차 관심이 낮아 해체신서의 국내 소개는 2014년 한길사 번역본이 최초다. 학문의 답보와 정보ㆍ인재의 부족은 왕조 쇠망이라는 실격의 역사로 이어진다.

끝으로 해방 후 역대 정권이 의료법 등으로 한의사의 주요 의과 의료기기 사용을 막아 한(韓)의학과 중(中)의학의 격차를 키워 국익을 해치고, 박근혜 정권이 최순실 등 비선 실세의 입맛에 맞춰 블랙ㆍ화이트 리스트 등으로 반민주적인 그들만의 리그를 운영하다 중도에 파탄난 사실 등도 위 논의의 연장선에서 이해될 수 있을지 모른다.

배준호 전 한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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