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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분쟁지역] 로힝야족 학살 앞에 ‘R2P’를 왜 망설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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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분쟁지역] 로힝야족 학살 앞에 ‘R2P’를 왜 망설이는가

입력
2017.12.15 19:00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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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비아 사태땐 1개월 만에 발동한

국제사회 약속 ‘보호 책임’ 독트린

인종청소ㆍ반인도주의 범죄이자

제노사이드로 볼 수 있는 상황에

국가별 이해관계 얽혀 있고

정치적 의지 약해 유엔도 ‘미적’

지난달 19일 방글라데시 콕스바자르 인근 쿠투팔롱 난민캠프에서 한 로힝야족 여성이 미얀마군으로부터 성폭행 피해를 입었던 사실을 털어놓고 있다. 초점을 잃은 채 아래만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국가로부터 보호는커녕, 가장 잔혹한 범죄피해를 당하던 순간의 공포심과 무력감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하다. 쿠투팔롱=AP 연합뉴스
지난달 19일 방글라데시 콕스바자르 인근 쿠투팔롱 난민캠프에서 한 로힝야족 여성이 미얀마군으로부터 성폭행 피해를 입었던 사실을 털어놓고 있다. 초점을 잃은 채 아래만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국가로부터 보호는커녕, 가장 잔혹한 범죄피해를 당하던 순간의 공포심과 무력감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하다. 쿠투팔롱=AP 연합뉴스

지난 11일 영국 하원 외교위원회는 ‘미얀마 라카인주 폭력사태와 영국의 대응’이란 제하의 로힝야 실태 보고서를 발표했다. 여기엔 주목할 만한 단어 3개로 이뤄진 표현이 있었다. ‘보호책임원칙(Responsibility to Protect)’, 이른바 R2P다. 보고서는 “로힝야 상황을 어떻게 규정하느냐는 중요하다. R2P를 발동해 국가들이 행동에 나서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라 적었다. 위원회는 또 로힝야 사태에 대해 “인종청소이자 반인도주의 범죄, 심지어 제노사이드(대학살)일 수도 있다”고 봤다. 이들 세 가지 모두 R2P 발동 조건인 ‘잔혹범죄(Atrocities crimes) 4개’에 해당한다. 나머지 하나는 ‘전쟁 범죄’다.

R2P는 국가가 잔혹범죄를 직접 자행하거나, 잔혹범죄로부터 자국민을 보호할 의지가 없을 경우엔 국제사회에 보호 책임이 있다는 독트린이다. 비판론자들은 이를 ‘현대판 제국주의’로 본다. 인도주의라는 미명 하에 타국의 주권을 침해한다는 것이다. 반면 옹호론자들은 군사개입에 초점을 둔 ‘인도주의적 개입’과 R2P는 다르다고 주장한다. R2P는 보다 광의의 개념이며, 일종의 정치운동이라는 이유에서다.

이 개념은 2001년 12월 캐나다 정부가 임시 구성한 ‘개입과 국가주권에 관한 국제위원회(ICISS)’의 보고서에 처음 등장했다. 1990년대 발생한 대량학살 2건, 즉 르완다 제노사이드(94년)와 보스니아 스레브레니차 인종청소(95년)가 촉발제가 됐다. 그리고 4년 뒤, 유엔세계정상회의에서 만장일치로 통과, 국제규범으로 공식화됐다. 당시 유엔결의안이 정한 R2P 원칙은 세 가지다. ▦국가는 자국민을 보호해야 하고 ▦국가가 보호능력이 없거나 책임을 방기하면 국제사회가 해당 국가 정부를 보조ㆍ압박ㆍ제재하는 정치외교적 노력을 다하며 ▦이 모든 노력이 허사로 돌아갈 땐 국제사회가 반드시 유엔안전보장이사회 승인을 거쳐 행동에 나선다는 것이다. 상대국이나 국제사회의 반발을 종종 초래하는 인도주의적 개입과 R2P가 나뉘는 잣대는 바로 마지막 단계, 유엔의 승인 여부다.

7일 방글라데시 쿠투팔롱 난민 캠프에서 한 로힝야족 난민이 심각한 영양실조와 피부병으로 고통받고 있는 생후 7개월 아들을 안고 있다. 쿠투팔롱=로이터 연합뉴스
7일 방글라데시 쿠투팔롱 난민 캠프에서 한 로힝야족 난민이 심각한 영양실조와 피부병으로 고통받고 있는 생후 7개월 아들을 안고 있다. 쿠투팔롱=로이터 연합뉴스

물론 R2P 적용 사례도 논란이 되긴 했다. 2011년 리비아 사태가 대표적이다. 그 해, 반(反)카다피 시위가 시작된 건 2월 15일이었고, 유엔 안보리는 3월 17일 리비아에 대한 각종 제재와 함께 ‘민간인 보호를 위해 모든 수단을 강구한다’는 내용이 포함된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R2P 발동까지 1개월 밖에 걸리지 않은 셈이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는 유엔 결의안을 무기 삼아 리비아 사태 군사개입에 나섰고, 같은 해 10월 카다피 정권은 무너졌다. 리비아의 혼란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다시 로힝야 사태로 돌아오자. 캐나다 퀸즈대의 루이 델 보아 교수는 지난 8일 현지 언론 기고문에서 “미얀마의 현 상황은 R2P 독트린이 의도하는 교과서적인 사례”라고 지목했다. 하지만 이어 “어느 나라도 이 독트린을 건드리려 하지 않는다”며 “정치적 의지가 약하고 주요국가들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어 R2P 독트린은 말잔치에 불과하다”고 꼬집었다. “R2P는 이제 무덤으로 사라질 것”이라는 게 그의 결론이다.

그 동안 로힝야 사태를 두고 미국변호사협회, 방글라데시 대법원장 등 여러 기관과 개인들이 R2P 발동에 호의적 목소리를 냈다. 그러나 ‘유럽로힝야위원회(ERC)’의 대변인인 아니타 청 박사는 기자와의 메신저 인터뷰에서 “R2P가 매우 복잡한 메커니즘이라 발동은 어려울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로힝야족이 R2P 발동을 말할 때 이는 무력 개입을 원해서라기보단, ‘안전지대’를 형성하고 유엔평화유지군이 주둔해 로힝야 학살 방지를 위한 모니터링 및 보호 시스템을 바라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런 가운데 유엔 안보리 회의를 하루 앞둔 11일, 전 세계 81개 국제인권ㆍ구호단체들은 공동 성명을 발표했다. 이들은 유엔이 ▦미얀마 군의 무기거래 금지 ▦반인도주의 범죄에 연루된 군인들에 대한 제재 ▦모든 수단을 동원해 국제재판소에 ‘책임자 처벌’ 촉구 등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R2P 글로벌 센터’의 사이먼 애덤스 국장은 “(군사적 개입보다는) 무기거래 금지, 책임자 처벌에 R2P의 초점을 맞추는 게 훨씬 효율적”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리비아 사태 당시 총알 같은 속도로 움직였던 국제사회는 ‘제노사이드’ 흔적이 짙은 로힝야 사태 앞에선 여전히 미적대고만 있다. 12일 유엔 안보리는 R2P는커녕 아무런 결의안도 통과시키지 못했다.

이유경 국제분쟁전문 저널리스트

10일 방글라데시 쿠투팔롱 난민 캠프에서 로힝야족 난민들이 트럭 앞에 모여들어 구호품을 받기 위해 손을 뻗고 있다. 쿠투팔롱=로이터 연합뉴스
10일 방글라데시 쿠투팔롱 난민 캠프에서 로힝야족 난민들이 트럭 앞에 모여들어 구호품을 받기 위해 손을 뻗고 있다. 쿠투팔롱=로이터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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