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알림

[천종호의 판사의 길] 권리, 정의의 요구와 은혜

입력
2017.11.30 13:20
29면
0 0

정의는 개인에게 사회적 가치를 적정하게 분배하고, 분배의 격차가 사회의 유대를 깰 정도에 이른 경우에는 격차를 조정하며(배분적 정의), 분배된 사회적 가치에 대해서는 배타적으로 누릴 수 있게 하고(향유적 정의), 사회적 가치를 침탈당하거나 그 누림에 방해가 있을 경우에는 이를 바로잡게 하는(시정적 정의) 권능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만약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 누릴 수 있는 사회적 가치를 보유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늘어난다면 어떻게 될까? 사회공동체에 회의를 느껴 사회의 통합을 방해하는 요소가 될 수도 있고, 극단적인 경우에는 타인의 사회적 가치를 침탈하는 범죄 행위를 저질러 질서를 깨뜨릴 수도 있다. 이는 결국 다른 사회구성원에게도 영향을 미쳐 자신에게 분배된 사회적 가치를 제대로 누릴 수 없게 할 가능성마저 있다. 따라서 정의의 출발점이자 핵심은 사회적 가치를 어떻게 분배하고 분배 격차를 여하히 조정할 것인가 하는 배분적 정의에 있다고 생각한다.

배분적 정의는 사회 구성원으로 하여금 사회적 가치에 대한 자신의 몫을 적정하게 분배해 줄 것을 청원할 수 있는 힘을 부여한다. 그 힘은 법적으로 보호받는 경우도 있고, 법의 보호 밖에 있는 경우도 있다. 법적으로 보호받는 힘은 ‘권리’라고 하고, 법의 보호밖에 있는 힘은 ‘정의의 요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계약직 노동자의 경우 동일한 근로를 제공하면서 정규직 노동자에 비해 낮은 급여를 받는다고 해도 법적으로 보호받는 급여는 사용자와의 계약에 따른 것에 불과하고 그 차액에 대해 요구할 수는 없다. 정의의 차원에서 지급해 줄 것을 요구할 수 있을지 몰라도 실정법적 차원에서는 그럴 권리가 없는 것이다. 정의의 요구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 사람들은 ‘억울함’을 느낀다. 하지만 이처럼 억울함을 호소하는 목소리가 많아지면 정의의 요구는 정치적으로 그 힘을 발휘하여 점차 법적인 권리로 확대되어 간다.

정의의 요구 영역이 법적 영역으로 확대되어 가는 것은 사회가 선진화되어 간다는 방증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반발로 인해 일시적으로 사회적 혼란이 초래될 수도 있으나 시간이 흐르면 타협의 산물이 도출되어 통합이 이루어지는 것을 우리는 역사 속에서 무수히 목도해 왔다. 이것이 바로 역사를 통해 드러나는 ‘정의의 힘’이다. 역사가 이렇게 흘러간다면 정의의 요구를 하는 사람들도 그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상대의 의견을 존중하는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 의견 불일치가 국론 분열에까지 이르러서는 좋을 게 없다. “의견의 발표를 억압함으로써 생기는 특유한 해악은 현 세대뿐만 아니라 후세의 전 인류에게서 행복을 빼앗는 것이며, 그 의견을 찬동하는 사람들은 물론 그 의견에 반대하는 사람들에게도 행복을 빼앗는 것이다. 만일 그 의견이 옳은 것이라면 사람들은 잘못을 진리와 바꾸어 가질 기회를 잃는다. 그 의견이 틀린 것이라면 앞의 경우와 거의 같은 정도의 커다란 이익, 즉 진리와 오류가 서로 충돌할 때 생기는 것과 같은 진리에 대한 보다 명확한 인식이나 생생한 인상을 잃게 되는 것이다”는 밀(J.S. Mill)의 충고를 명심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법적 권리로 수용될 수 있는 정의의 요구 영역은 한계가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사회적 가치에 대한 모든 분배 요구를 정의의 요구로 받아들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예컨대 아무리 배가 고파도 제과점에 가서 공짜로 빵을 요구할 수 없는 것처럼 개인의 ‘필요’에서 비롯된 사회적 가치의 분배 요구는 현행 사회 질서 내에서 정의의 요구로 받아들일 수 없다. 부탁이나 요청을 하였음에도 아무도 관심을 보여주지 않고 냉랭한 반응만 돌아온다면 ‘서러움’을 느끼는 게 인지상정이겠으나 이러한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하여 정의롭지 않은 사회라고 할 수는 없다. 만약 배고픈 사람을 가엽게 여긴 제과점 운영자가 빵을 나누어 주더라도 그것은 그 사람에게 받을 만한 권리가 있거나 정당한 요구를 했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은혜를 받는 것에 불과하다. 은혜를 구하는 것은 권리도 아니고 정의의 요구도 아니며, 은혜가 베풀어졌을 때 감사할 수 있는 조건일 뿐이다.

그렇다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그대로 방치하는 것은 사회공동체가 그 임무를 다하지 않는 것이 된다. 은혜를 요청하는 사람은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에 서러움과 비참함을 느끼게 마련이다. 그러한 감정을 해소해 줄 수 있는 길은 은혜의 요청에 대해 그것을 권리로 인정하지는 않더라도 ‘정의의 의무’로 응대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념을 반영하는 것이 기독교 성경의 ‘체다카(Tzedakah, 정의)’이다. 복지제도를 세밀하게 정비해 나가고, 미비한 복지제도에 대해서는 사회구성원들이 자발적으로 나서 자선을 베푸는 등으로 공백을 메워나가는 것이 바로 체다카의 정신이다.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와 옥에 갇힌 자와 장애인과 병자’로 대표되는 사회적 약자들에게 사랑을 실천하라는 체다카 정신이야말로 오늘날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정신이 아닐까?

천종호 부산가정법원 부장판사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