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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민 칼럼] 교토 기행, 무진 기행 풍으로

입력
2017.11.19 13:27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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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 철 금각사에 몰려드는 관광객들

실패로부터 도망이나 새 출발을 위해

삶의 진짜 이야기는 허공에 흩어지고

하루카 쾌속열차가 산모퉁이를 돌아갈 때 나는 교토(京都)라는 이정비를 보았다. 그리고 뒷좌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다시 시작된 대화를 들었다. “그러고서도 대학이라고 할 수 있어요?” “학생들 가르친다는 사람들이 부끄러움도 모르고.” 비행기에서 열차로 갈아탄 이래 뒤에 앉은 대학원생들이 낮은 목소리로 얘기하는 것을 반수면 상태 속에서 듣고 있었다. “교토엔 옛 절들 빼면, 명산물이....뭐 별로 없지요?” 그들은 대화를 계속하고 있었다. “별게 없지요. 그러면서도 그렇게 많은 관광객들이 모여든다는 건 좀 이상스럽거든요.”

교토엔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허공에 대고 말하는 사람들이다. 매해 단풍 드는 철이 되면, 이승에 한이 있어서 찾아오는 귀신들처럼 외국 관광객들이 교토의 절들에 몰려든다. 그리고 안개와 같은 입김을 내뿜듯이 교토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가야 할 곳의 위치를 묻는다. “금각사로 가려면 어떻게?” 교토 사람은 손을 들어 북서쪽을 가리킨 뒤, 천천히 금각사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한다. “당신이 찾는 금각사는 그곳에 없어요....”

관광객들은 그 말을 듣지 않은 채 그가 가리킨 방향으로 이미 바삐 걸어가고 있다. 그러나 교토 사람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이 정해진 대로 금각사에 대해 차근차근 설명을 계속한다. “원래 금각사는 세상에 불만을 품은 승려가 방화를 해서 타버렸어요. 새로 지었기에, 당신이 찾는 그 금각사는 거기 없어요. 차라리 은각사로 가세요.” 아무도 없는 허공을 향해서. 원칙대로, 매뉴얼대로, 설명이 끝나야 비로소 그 역시 자기 길을 갈 것이었다. 이 허공이야말로 교토 사람과 관광객을 떼어놓는 교토의 안개와도 같은 것. 허공을 향해 이야기하고 있는 사람들이야말로 교토의 명산물이 아닐 수 있을까.

내가 교토로 향할 때는 매번 서울에서의 실패로부터 도망해야 할 때거나 무언가 새 출발이 필요할 때였었다. 직장에 새 건물이 들어설수록, 총장 선거를 위한 구호가 화려해질수록, 취업을 앞둔 학생들의 불안이 높아질수록, 나는 허공에 대고 이야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럴 때면, 교토가 무진의 안개처럼 내 마음 속에 피어 올랐다. 학생들을 가르친다는 것, 논문을 쓴다는 것, 진리란 무엇인가, 라고 묻는 이 모든 것이 실없는 장난이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특히 올해는 누가 정권을 잡느냐에 따라 대학병원에 입원한 환자의 진단 결과가 바뀌는 황당한 경험을 했다. 생명을 다루는 의학의 세계에서 마저 원칙도 매뉴얼도 없단 말인가. 이런 생각이 나를 홱 잡아 끌어당겨서 교토로 가는 비행기 앞으로 내던진 것이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문득 메신저를 통해 누군가 말을 걸어온다. “칼럼 잘 읽고 있어요. 교토에 오셨다죠. 저도 마침 교토에 있는데. 칵테일 한잔 하실래요 라고 하면 저 차단하실 거예요? 독자 1인 올림.” 후쿠오카처럼 교토에도 현직 승려가 바텐더로 재직 중인 칵테일 바가 있을지 모른다. 칵테일 이름은 애욕지옥(愛欲地獄), 극락정토(極樂淨土)라고 한다던데. 그 칵테일 바 앞에는 정적 속에서 개 두 마리가 혀를 빼물고 교미를 하고 있고, 칵테일 바 뒤에는 뱃속에 숨어 있던 불타가 뚱보의 기름진 뱃가죽을 에일리언처럼 찢고 나오는 형상의 부처상이 있다던데.

살아가다 보면, 자기 안의 관광객이 질문을 던질 때가 있다. “깨달음을 얻는 곳, 금각사로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 자기 안의 고지식한 안내자가 천천히 답을 생각하고 길을 가르쳐주려고 하면, 그 관광객은 이미 서둘러 떠나고 없다. 그래서 삶에 대한 진짜 이야기는 대개 허공에 흩어지게 된다. 허공에다 이야기 하다가 죽는 게 인생이지. 그러나 이것도 사치스러운 생각일 거야, 병원에 누워 있지 않으면 행복한 것이지. 이처럼 건전한 생활철학에 생각이 미치자, 길가에 세워진 하얀 팻말이 보였다. “당신은 교토를 떠나고 있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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