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알림

[이나미 칼럼] 부끄러운 선배가 후배들에게

입력
2016.10.06 14:14
0 0

젊어서는 오지에서 봉사하는 의사로서의 인생을 꿈꿀 때가 있었습니다. 한 편으로는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들이 정신과 환자들이니, 그들을 위해 봉사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런 소망과는 거리가 먼, 그야말로 소시민적인 일상에 파묻혀 살았네요. 돌이켜 보면, 후배들과 제자들에게 부끄러운 것이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물론, 나름 노력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일 년 내 한 번도 이부자리를 깔지 않고 공부했던 고3 때가 가장 편하고 행복했다는 생각이 들 만큼 고달팠던 날이 대부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저 시부모와 함께 살며 제 식구들 챙기느라 바빴기 때문일 뿐입니다. 그나마 존경받으며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는 의사라는 직업 때문에 오히려 버틸 수 있었겠지요. 촌각을 다투며 생명을 다루는 상황에 있는 다른 의사들에 비해 작은 사무실에서 혼자 상담만 하는 일개 정신과 의사라 무탈하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저의 부족함을 넉넉하게 품어 주셨던 따뜻한 환자들을 만난 덕도 큽니다. 제 의도가 아무리 선한 것이라 해도 크고 작은 실수가 많았을 것인데 말입니다.

돌이켜 보면 그렇게 사회에 빚진 일이 많은데 저는 과연 어떻게 살았을까요. 찔끔 보내는 기부금을 제외하고는 가난으로 헐벗은 이웃, 억울하게 맞거나 죽어가는 이웃, 돈이 없어 병을 치료하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한 것이 정말 너무 없습니다. 개인적인 삶에 충실한 동안, 정의로운 사회를 꿈꾸던 젊은 시절의 저는 간데없고, 제 몸 하나 추스르기 바쁜 초로의 아주머니가 되었습니다. 조용히 봉사하고 있는 의사, 열악한 환경에서도 환자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의사, 선진의학을 넘어서기 위해 밤새며 연구를 계속하는 의사들에 비해 제가 초라하고 부끄러운 이유입니다.

세상은 의사들을 돈과 권력만 추구하는 이기적인 집단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의사들을 도둑 취급하는 보험공단의 횡포, 정권만 바뀌면 전문가부터 죄악 집단으로 몰고 가는 권력과 매스컴 탓도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저를 포함해서 많은 의사가 지금까지 정의로운 사회, 모두가 행복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무엇을 했을까요. 역사의식, 사회의식은커녕, 전문가로서의 소임은 제대로 했을까요. 그저 자기와 그 주변 사람만을 위해, 의사라는 이익집단을 위해, 자기가 속한 무슨 무슨 협회와 동문회 등을 위해 배타적인 활동만 하면서 마치 아주 열심히 살고 있다는 착각에 빠진 것은 아닐까요. 자칭 타칭 전문가지만, 책 한 줄 읽지 않는 사이비 지식인은 아닐까요. 그나마 손에 드는 책을 통해서는 달콤함, 아니면 허세만 추구하고 있으니, 자신들이 저지르는 엄청난 오류도 볼 줄 모르면서 말입니다.

이런 와중에 선배들을 비판하고 나선 후배 의학도들의 대자보와 선언들은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특히 사회의 모순에 관해서는 관심이 없고 이익만 추구한다는 오해를 받아왔던 의대생들이 소리를 모아 선배들의 실수를 바로잡으려 하는 용감한 태도는 정말 부러웠습니다. 세상에는 존경받을 만한 선배 의사도 많았지만, 비도덕적인 일들을 아무 죄의식 없이 하는 의사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거액의 돈만 갖다 주면 수술날짜를 금방 잡아 주었던 유명 교수들. 제자들을 때리거나 언어폭력과 성희롱도 농담이자 가르침이라고 강변했던 교수들. 제자들에게 힘든 일은 다 시키고 명예와 돈만 챙겼던 교수들. 인사권을 빌미로 제자들을 착취하는 교수들 이야기가 비밀 아닌 비밀이었지요. 이런 과거의 잘못들을 저같이 평범하고 무능한 선배는 바로잡지 못하고 그저 넘겨 버렸습니다. 쓸데없는 일에 괜히 말려 들어가면 좋을 건 없다는 소시민적 침묵이 바로 그와 같은 정의롭지 못한 일들을 방조했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바뀌어 가고 있고, 여러분들은 저와는 많이 달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마침 사회에 대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으니, 앞으로도 권력과 돈을 지향하던 과거 선배들의 바르지 못한 점을 더 많이 지적해 주십시오. 관행이라는 탈을 쓰고 불의와 타락에 묻어가던 선배들에게 후배들의 매서운 죽비는 꼭 필요합니다.

이런 당부는 의사사회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오죽하면 김영란법이 시행되면 세상이 망할 것처럼 걱정하는 이들이 많겠습니까. 돌이켜 보면 좀 더 정의롭고 투명한 사회로 바뀔 때마다 항상 넘어가야 할 고비가 많았습니다. 그렇다고 과거의 어두웠던 시대로 퇴행해야 할까요. 비극적인 시대의 온갖 정의롭지 못한 일들에 향수를 느끼며 어깃장과 방해를 놓는 세력들에게 또 기회를 줘야 할까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쪼록 새로운 세대에게 어울리는 새 세상을 만들어 주십시오. 공정함과 상식이 통할 수 있는 그런 세상 말입니다. 비관과 냉소, 무기력과 패배감은 젊은이들에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저를 포함해, 대부분 기성세대가 그동안 그 잘난 생존을 위해 참 많이 타협하고, 침묵하고, 권력과 돈에 어쩔 수 없이 혹은 적극적으로 빌붙어 살았다면, 여러분은 달라져야 합니다. 지금보다 더 매섭게 기성세대들을 몰아붙여도 좋습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이 가고 싶은 길을 거침없이 가도록 하십시오. 저같이 제대로 살지 못한 기성세대들의 못난 점만은 부디 닮지 말고 말입니다. 답이 없다 마시고, 기성세대에게 더 많이 묻고 따지십시오. 길이 없다 하지 마시고, 부디 힘을 모아 지금처럼 새로운 길을 계속 만들어주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이나미 이나미심리분석연구원 원장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