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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레기’와 ‘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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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레기’와 ‘저널리스트’

입력
2015.12.25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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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엄마, 기자들은 다 저렇게 일해요?”

집에서 영화 ‘열정 같은 소리 하고 있네’를 함께 보던 딸이 묻는다.

“하하… 다 저러는 건 아니야. 비슷한 점도 있긴 한데…”

영화 속 수습기자 도라희(박보영 분)는 경영상 위기로 인적 구조조정을 하고 있는 스포츠신문에 입사해 막말과 호통을 일삼는 연예부장 하재관(장재영 분) 밑에서 구박을 받으며 취재를 한다. 우연히 유명 연예기획사의 비리를 알게 되지만 사측은 그 회사가 이 언론사의 주요 광고주라는 이유로 기사가 나가지 못하도록 막는다.

영화에는 현재 언론사가 갖고 있는 다양한 악습이 나열된다. 인격 모독적 발언을 서슴지 않는 수습기자 교육, 경영상 어려움 때문에 특종기사도 내보내지 못하는 편집권 침해, 비리나 문제점을 파헤치려는 목적이 아니라 특정한 상대를 굴복시키기 위해 ‘죽을 때까지 조지는’ 권한 남용….

아쉽게도 영화는 도입부의 이러한 문제제기를 후반부로 갈수록 정당화하거나 모호하게 봉합시키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수습기자를 심하게 갈구는 부장일수록 오히려 후배에 대한 정과 믿음이 더 강하다는 식의 언론계 신화가 영화 속에서도 되풀이되고, 회사의 경영을 위해 고발기사를 묻어버리는 것이 정당한 것은 아니지만 어쩔 수 없는 안타까운 일인 것처럼 포장된다.

박보영의 넘치는 귀여움과 정재영의 열연, 웃음 터지는 코믹한 장면들 때문에 딸은 이 영화를 꽤 재미있게 본 것 같았다. 실제로 영화관이 아니라 집에서 ‘치맥’과 함께 보기에는 나쁘지 않은 영화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영화가 흥행에 실패한 것은 우연으로 이어지는 엉성한 줄거리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기자가 보기에도 동의가 안 되는 부분이 있는데 기자가 아닌 사람들에겐 마치 ‘기레기의 애환을 이해해달라는 영화’로 느껴질지 모르겠다. 반면 언론을 아예 거악의 한 축으로 묘사한 영화 ‘내부자들’은 크게 흥행했다.

이번 연말에는 유난히 언론을 다룬 영화가 많았다. 하지만 긍정적으로 묘사한 것은 하나도 없다. 실제 미디어업계를 돌아봐도 기자들에게는 최악의 한 해였다. 주요 방송사와 통신사에서 눈밖에 난 기자들에게 보복성 징계를 내리고 법원이 이를 무효라 해도 사측이 무시하는 일이 계속됐고, 인쇄매체 구독 부수는 급감했고 방송광고 시장의 경쟁도 더 심해져 언론사들의 경영은 계속 어려워졌다. 여당 대표가 포털 뉴스가 편향되었다고 공격하며 인터넷 언론을 압박했고, 공영방송은 우익인사들에 장악돼 편향 보도가 이어졌다. 심의기관은 언론의 정당한 취재 활동까지 위축시키고 있고, 경찰은 시위 현장을 취재하는 기자에게 물대포를 쏘고 심지어 목 졸라 연행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취재 활동이 직접적으로 위축되는 와중에 기자로서의 자부심도 땅에 떨어졌다. 대중은 기자들을 ‘기레기’라고 부르는 데 익숙해졌다. 인터넷에서 수많은 어뷰징 기사, 베껴쓰기 기사, 낚시 기사에 질린 네티즌들이 그런 표현을 쓰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어뷰징 당번 한 명이 하루에 수십, 수백 개 쏟아내는 기사 속에서 옥석을 가리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지난 15일 뉴데일리가 내보낸 ‘강두리 교통사고로 사망, 과거 ‘새빨간 비키니’ 입고… 워터파크 광고 재조명’이란 기사는 지난 한 해 수많은 어뷰징 중에서도 가장 충격적인 사례로 기록될 것이다.

새해에 포털뉴스제휴평가위원회가 활동을 시작하면 외적인 취재 제약까지 해소되는 것은 아니더라도 어뷰징 등 언론사들의 문제 행위는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기레기’ 아닌 ‘저널리스트’로 가슴 펴고 당당히 일할 수 있는 기자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그러려면 당연히 언론계가 먼저 스스로 반성해야 한다. ‘열정 같은 소리 하고 있네’처럼 변명할 구실만 찾으려 들지 말고 말이다.

디지털뉴스부 기자 parisco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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