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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천고사설] 암살과 김원봉

입력
2015.08.20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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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암살'의 한 장면. 조승우가 김원봉 역할을 맡았다.
영화 '암살'의 한 장면. 조승우가 김원봉 역할을 맡았다.

얼마 전 서울 서대문 독립공원 내 현충사(독립관) 지하 강당에서 ‘류자명 선생 서거 30주년 추모 학술세미나’가 열렸다. 류자명(柳子明ㆍ1894~1985)이란 이름을 아는 국민은 별로 없겠지만 의열단 참모장으로서 약산 김원봉과 함께 의열투쟁, 즉 직접행동을 이끌었던 독립운동가이다. 1930년대 상해에서 아나키스트들의 직접행동 조직인 남화한인청년연맹을 이끌었던 정화암이 말한 것처럼 일제가 가장 두려워한 것은 총과 폭탄을 들고 저항하는 의열투쟁, 즉 직접행동이었다. 그 정점에 김원봉이 의백(義伯ㆍ단장)인 의열단이 있었다.

1919년 11월 9일 길림성 파호문 밖 중국인 반모씨 집에서 결성된 의열단은 “천하의 정의의 사(事)를 맹렬히 실행키로 함/ 조선의 독립과 세계의 평등을 위하여 신명(身命)을 희생하기로 함…” 등의 강령을 가지고 일제와 맞서 싸웠다. 현재의 이슬람 무장투쟁 조직들이 대상을 가리지 않는 무차별 테러에 나서는 것과 달리 의열단은 조선총독 이하 고관, 군부 수뇌, 매국노, 밀정 등 ‘칠가살(七可殺)’로 분류한 정확한 타격 대상이 있었다. 1921년 9월 의열단원 오성륜이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던지고, 이듬해 3월 오성륜, 김익상 등이 상해 황포탄 부두에서 일본의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를 저격하는 등 정확한 타격 대상을 선정해 행동에 나섰다. 이때 다나카가 몸을 숙이는 바람에 미국 여인 스나이더가 잘못 맞아 숨지자 물의가 일었다.

일제의 압력에 굴복한 상해의 조계(租界) 경찰 당국은 ‘불온행동’ 단속 강화의 방침을 공포해서 한인 독립운동가의 총기류 휴대를 억제하고, 주중(駐中) 미국 공사는 “조선인 독립당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공산주의자의 행함과 같은 잔혹한 수단으로 나옴은 미국은 물론 세계 어느 나라든지 찬성치 아니하는 바”라며 유감을 표시했다. 상해의 일부 외교독립론자들이 이에 가세해 의열단의 직접행동을 비판했다. 그러자 김원봉과 류자명은 북경의 단재 신채호를 찾아가 선언문 작성을 부탁했고, 그 결과 탄생한 것이 ‘의열단 선언문’이라고도 불리는 ‘조선혁명선언’이었다. “강도 일본이 우리의 국호(國號)를 없이 하며 우리의 정권을 빼앗으며, 우리 생존 조건의 필요성을 다 박탈하였다”로 시작되는 ‘조선혁명선언’은 독립운동계 일부의 타협적 경향을 강하게 비판하면서 “민중은 우리 혁명의 대본영(大本營)이다/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한 무기이다”라고 선언했다.

1924년 1월 상해의 프랑스 공무국 경무처 정보문서(낭트 소장자료)는 상해의 프랑스 조계를 관장하는 국제경찰이 세 명의 중국인들을 체포했는데 그 중 리볼버 권총을 소지한 한 명이 “의열단 단장 김원봉을 살해하는 대가로 600달러를 일본인들에게서 받았다고 했다”고 보고하고 있다. 일제는 김원봉에게 거액의 현상금을 건 것으로도 부족해 중국인 부랑자들에게 암살까지 사주했을 정도로 김원봉을 제거하고 싶어 했다. 일본의 ‘조일신문(朝日新聞)’에 따르면 1922년 11월 상해 프랑스 조계의 한 건물 2층에 있던 임시정부의 집세가 월 70달러 정도였으니 600달러는 거액이었다.

해방 후 김원봉이 귀국했을 때 고향인 밀양 사람들은 밀양역에서 환영대회가 열리는 초등학교까지 가마니를 깔았다는 말을 들었다. 최근 김원봉의 막내 여동생 김학봉은 한 방송인터뷰에서 “오빠가 밀양까지 오는데 학생들이 전부 다 태극기 들고 만세하고 맞이했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이런 기쁨도 잠시 상황은 곧 반전되어 세상은 다시 친일파의 수중에 들어갔다.

이회영 선생의 손자인 이종찬 전 국정원장으로부터 들은 의열단 단원 유석현 선생 이야기가 있다. 해방 후 김원봉이 일제 고등계 경찰 출신 노덕술에게 종로 한 복판에서 체포되어 수모를 겪은 후 유석현의 집을 찾아가 며칠 밤낮을 울면서 통음하다가 김구와 남북협상 때 방북해 내려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자발적인 월북이 아니라는 뜻이다. 막내 누이 김학봉은 경남여고 2학년 때 형사들에게 끌려가서 온갖 고문을 당한 끝에 지금도 손을 못 쓴다고 말했다. 다른 누이, 오빠들이 모두 살해된 것에 비하면 목숨은 건졌으니 다행이라 해야 하나? 할 수 없이 북한으로 갔으나 “한 사람이 아홉 사람을 위하고, 아홉 사람이 한 사람을 위하여 헌신한다”는 강령을 갖고 있던 의열단 단장 김원봉에게 김일성 개인을 우상화하던 북한 전체주의가 맞을 리 없었다. 북한에서 김원봉의 최후는 북한이 그를 애국열사릉에 안장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익히 짐작할 수 있다.

대한민국이 민족사의 정통이라고 주장하려면 김원봉의 의열투쟁 등을 초등학교 때부터 가르쳐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김원봉의 이름을 한국사교과서에서 지울지도 모른다는 주장이 나올 정도로 거꾸로 가고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장, 즉 국방부장관 자격으로 귀국한 김원봉을 뺀 교과서와 “3ㆍ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대한민국 헌법이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지 묻고 싶은 광복 70주년이다.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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