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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천고사설] 스승의 길

입력
2015.08.06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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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는 정치에서는 실패했지만 교육에서는 성공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공자의 교육법은 요즘 말로 자기주도형 학습법이었다. 그는 “힘쓰지 않으면 열어주지 않으며, 표현하려 애쓰지 않으면 밝혀주지 않으며, 한 모퉁이를 들어 (가르쳐)주었는데, 세 모퉁이로 답하지 못하면 다시 말해주지 않는다”(논어 ‘술이(述而)’)는 교육관을 갖고 있었다. 배우는 자가 스스로 알려고 노력해야 하고, 하나를 가르쳐 주면 나머지 셋은 스스로 알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교육법이다.

공자는 또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지? 라고 말하지 않는 자는 나도 어떻게 할 수가 없다(不曰, 如之何如之何者, 吾末如之何也已矣)”(논어 ‘위령공(衛靈公)’)라고 말했다. 스스로 의문을 갖고 답을 찾기 위해 노력하라는 것이다. 기원전 5세기경 그리스의 소크라테스가 문답식으로 학생들을 가르쳤던 산파법(産婆法)보다 약 1세기 빠른 교육법이었다.

유학의 비조(鼻祖) 공자가 만세의 스승이 된 이후 유학자들은 곧 교육자였다. 유배지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때로는 유배지의 교육이 역사를 바꾸는 경우도 있었다.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이 연산군 4년(1498년)의 무오사화(戊午士禍) 때 평안도 희천으로 유배 갔다가 부친의 부임지에 따라온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에게 성리학을 가르친 것이 이런 예이다.

정약전ㆍ정약용 형제 또한 유배지 흑산도와 강진에서 학교를 열었다. 정약용은 강진의 다산초당에서, 정약전은 흑산도의 ‘복성재(復性齋)’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다. 복성(復性)이란 인간 본래의 순수하고 지선(至善)한 성(性)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성리학의 주요 이론으로서 당(唐)나라 유학자 이고(772~841년)가 제창했다. 유배지에서 연 서당의 이름이 복성재인 것은 성리학이 아닌 사교(邪敎ㆍ천주학)을 신봉했다면서 그를 유배 보냈던 노론 성리학자들이 얼마나 교조주의자들이었는가를 잘 말해준다.

필자는 10여년 전 흑산도의 지프택시를 타고 선착장 반대편 사리의 복성재를 찾은 적이 있다. 복성재 아래 햇빛에 반짝이는 푸른 바닷물을 보면서 아무 죄도 없이 이곳까지 유배와 섬 아이들에게 학문을 가르쳤던 한 지식인의 불우한 생애에 가슴 아팠던 기억이 새롭다. 남해 푸른 바다로 가로막힌 두 형제의 형제애는 남달랐다. 유배 14년만인 순조 14년(1814년) 사헌부ㆍ사간원에서 올리는 유배자 명단에 정약용의 이름이 빠졌다. 정약용이 쓴 정약전의 묘지명인 ‘선중씨(先仲氏) 묘지명’에는 정약전이 이 소식을 듣고 “내 동생이 이 깊은 바다를 두 번이나 건너서 나를 보러 오게 할 수 없다”면서 흑산도에서 강진에 더 가까운 우이도로 이사하려 했다고 전한다. 우이보(牛耳堡)라고 불렸던 우이도는 흑산도에 속했기에 우이도로 이주하는 것은 유배지 이탈이 아니었다.

그러나 흑산도 사람들이 가지 못하게 막았다. 정약전은 우이도 사람에게 데리러 오라고 명해서 안개 낀 야밤에 우이도로 떠났다. 날이 개면서 정약전이 사라진 사실을 안 흑산도 사람들은 날랜 배를 타고 정약전을 중간에 탈취해 돌아왔다. 그러나 정약전이 동생과의 정리를 설명하면서 흑산도 사람들에게 애걸해 겨우 일 년 후 우이도로 옮길 수 있었다. 그러나 정약전은 유배 16년 만에 끝내 동생을 못보고 세상을 떠나는데, 정약용은 두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요즘 세상에 수령이 상경했다가 다시 내려오면 백성들이 길을 막고 거절한다는 소리는 들었어도 유배객이 다른 섬으로 이주하려 하자 원래 있던 곳의 섬사람들이 길을 막고 남아 있어 달라고 했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다(‘두 아들에게 부친다(1816년 6월 17일)’)”라고 한탄했다.

정약용이 다산초당에서 가르친 평민 제자 황상(黃裳ㆍ1788~1863년)과의 인연도 남달랐다. 다산은 순조 18년(1818년)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 마재로 돌아갔는데, 황상은 헌종 2년(1836년) 강진에서 마재까지 걸어서 스승의 회혼례(回婚禮)에 참석했다. 그 해 정약용은 세상을 떠났는데 10년 후인 헌종 11년(1845년)에 황상은 스승의 기일에 맞춰 마재를 다시 찾았다. 그리고 정약용의 아들인 정약연 등과 ‘정황계(丁黃契)’를 만들었다. ‘황정계첩(黃丁契帖)’과 ‘정황계첩(丁黃契帖)’이 전해지고 있는데, 이중 ‘황정계첩’은 황상의 이름을 양반이자 3년 연상이었던 정학연보다 먼저 쓰고 있다(실학박물관 ‘유배지의 제자들’ 51~52쪽). 이 두 집안의 교류는 이후에도 계속되는데, 유배지에서 맺은 교육의 인연이 이리 길게 이어졌던 것이다.

서울 서대문구의 한 고교에서 벌어진 성추행 사건 때문에 시끄럽다. 교사가 수업시간에 “원조교제 하자”는 말까지 했다니 믿기조차 힘들다. 위부터 아래까지 어느 한 구석 중심 잡는 곳이 없으니 옛 선비들이 살았다면 말세라고 한탄했을 것이다. 이런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 그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목숨을 잃었는가? 한탄이 절로 나오는 광복 70주년이다.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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