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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수 칼럼] 불행사회를 이기는 법

입력
2014.08.26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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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건재한 ‘을사오적’

불행사회의 개혁은 ‘나’부터

욕망을 버리는 가치의 삶 찾아야

시나브로 휴가 끝물이다. 다시 신발 끈을 묶을 때다. 다만 안타깝게도 결기가 실천될 생활현장은 어지럽고 혼란스럽다. 불통은 고집스럽고 개혁은 서랍신세다. 정상사회라고 말하기 힘든 비논리와 엇박자가 이성실종을 고발할 뿐이다. ‘표리부동(表裏不同)’의 전형이다. 뉴스는 읽기조차 싫다. 수미일관 짜증나고 피곤하다. 퇴행에 가까운, 얽히고 막힌 총체적 난국증거로 가득하다. 폐색(閉塞)적인 ‘불행사회’의 확대다. 명줄대로 살자면 안 보는 수 뿐이다. 자포자기 속의 정치혐오다. 혹여 고도로 계산된 정치공학의 셈법이면 역사에 남을 진화론적 성공사례다.

새삼스러울 건 없다. 권력의 부조리와 비타협, 무능력은 예부터 그래왔다. 달라질 걸 바랐다면 번지수를 한참 잘못 짚었다. 급할 때 쏟아지는 그들의 눈물연기는 악어조차 혀를 내두른다. 1970년 김지하가 지적한 재벌, 국회의원, 고급공무원, 장성, 장차관의 ‘을사오적(乙巳五賊)’은 건재하다. 사라졌다고 믿으면 오판이다. 되레 한층 복잡다난한 생존력을 발휘하며 현대계급론의 정점에 섰다. 어느 때보다 돈독한 권력유착으로 서로를 챙긴다. 정권교체 경험에도 불구, 권력 앞의 진영논리도 매한가지다. 십분 양보해도 정도 차이의 문제다. 허무한 권력속성이다.

권력은 불행사회의 승자다. 순금의 순도비율처럼 한정자원을 독점하며 그들만의 리그를 구성한다. 정치든 경제든 권력쏠림은 나날이 심화된다. 반대로 불행사회의 충격과 몰매는 고스란히 권력 이하의 일반대중 몫이다. 격차심화의 희생양답게 패배, 박탈감에 신음한다. 자살률 우울증 실업률 등 불행지표는 악화일로다. 잘 모시겠다던 국민, 고객은 시즌행사의 꼭두각시로 전락했다. 가난한 사람이 왜 부자를 위해 행동할 수밖에 없는지 이것만큼 명쾌한 설명도 없다.

그렇다면 불행사회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일까. 아니다. 불행사회를 살아야 할 까닭도 당위도 없다. 물론 불행을 행복으로 치환하는 것은 어렵다. 겨우 바꿨더니 ‘그 나물의 그 밥’을 가르쳐준 게 또 권력의 기본속성이었다. 속수무책일 수 없다. 좌절, 포기는 더더욱 금물이다. 이견이 조율되고 상대를 존중하며 전체를 아우르는 행복사회를 위한 지향과 실천은 지켜야 할 시대사명이다. 어쩌면 자녀세대를 위한 최대한의 선물이자 최소한의 예의다. 꽃보다 아름다운 후세대를 위한 일이다.

출발은 ‘나’부터다. 불행사회를 바꿀 단초는 개인에 있다. 스스로 변함으로써 활로를 찾는 게 현실적이다. 권력이 규정하고 강제한 기존질서와 고정관념에 맞선 대항권유다. 권력이 설치해둔 불행장치를 거부하고 일탈하는 식이다. 이때 필요한 건 눈높이의 자기조정이다. 가령 인간성을 상실한 채 합리성을 강조하는 주류경제학의 거부시도를 예로 보자. 주류경제학은 소비능력이 행복증진과 비례한다고 봤다. 더 벌면 행복해진다는 기계적이고 물질적인 접근법이다. 무한경쟁과 승자독식의 탄생배경이다. 현실은 그렇잖다. 생활수준은 좋아졌는데 불행감도는 나빠진 사례가 많다. 높은 눈높이와 낮은 현실성의 격차가 불행을 확대재생산한다.

행복수식은 간단하다. 폴 새뮤얼슨이 소개한 행복공식(행복=자원/욕망)의 역발상적 접근이 바람직하다. 자원을 안 늘리고 욕망만 줄여도 행복해서다. 자원일변도의 논리거부다. 돈과 행복이 비례하지 않는다는 연구는 많다. 2만달러(1인당 국민소득)를 넘기면 관계가 없다는 이스털린(Easterlin)의 역설이 유명하다. 사회적경제, 공유경제 등의 대안모델도 연장선이다. 최저수준만 아니면 다양한 삶의 방식과 만족조합은 가능하다. 비교하지 않는 삶도 행복실현의 지름길이다.

작은 물꼬가 큰 장벽을 허문다. 거창하되 허무한 국가개혁보다 풀뿌리의 작은 가치실현이 사회를 바꾼다. 요즘 ‘작은 집(Small House)’ 운동이 화제다. 큰 집의 거대욕망을 내려놓으면 행복이 찾아온다는 의미다. 큰 집만 버리면 채워 넣을 걱정도, 더 벌어야 할 이유도 줄어든다. 작은 집의 큰 가치다. 불행에서 벗어날 첫걸음이 아닐 수 없다. 돈을 버는 이유가 명확할수록 만족조합과 행복모델은 뚜렷해진다. 돈과 가족의 갈등압박도 낮아진다. 이쯤에서 자문해보자. 나는 왜 사는가.

한양대 국제학대학원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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